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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탐방] 박물관으로 떠나는 '그때 그 시절' 추억 여행
서울생활사박물관
2019-12-09 08:01:20최종 업데이트 : 2019-12-09 08:01:20 작성자 :   연합뉴스

[박물관 탐방] 박물관으로 떠나는 '그때 그 시절' 추억 여행
서울생활사박물관

(서울=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삐삐, 시티폰, 포니원, 자바라 TV…
30여년 전만 해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친근한 물건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일상에서 자취를 감춘 추억의 소품들이다. 어른 세대에게는 옛 시절 추억을 불러일으키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실물로 본 적 없는 신기한 물건이기도 하다.
노원구 서울생활사박물관은 이런 '생활유물'들로 가득하다. 도슨트도 필요 없다. 엄마·아빠, 혹은 할머니·할아버지가 추억을 떠올리면서 아들딸, 손자 손녀에게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지난 9월 정식 개관한 서울생활사박물관은 2010년 북부법조단지가 이전하면서 오랫동안 방치됐던 법원 건물을 서울시가 리모델링했다.
박물관을 채운 유물 1천여점은 대부분 시민들이 기증한 것이다. 1970년대 서울 거리를 누볐던 포니·브리사 자동차부터 중장년층이 어린 시절 갖고 놀았던 종이 딱지와 종이 인형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시민들의 서울살이를 속속들이 보여준다.



◇ 소달구지, 얼음낚시, 전차…서울의 이색 풍경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 통나무를 실은 소달구지가 한가롭게 걸어간다. 소공동 거리에는 승객을 가득 태운 전차가 다니고, 마포 나루터에는 배를 타고 여의도에 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1층 '서울풍경' 전시실 사진들에서 볼 수 있는 1950년대 서울 풍경들이다.
이곳에서는 시대별로 변화해 온 서울의 모습을 유명 작가의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그 시절 높은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물지게를 지고 가파른 계단 길을 힘겹게 오르내려야 했다. 겨울이 되면 꽁꽁 언 한강 위에서 썰매를 타고 얼음 낚시하는 모습도 지금은 보기 힘든 풍경이다.
전시실 안쪽으로 더 들어오면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붉은색 '브리사' 자동차와 초록색 '포니원' 택시가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든다. 오래전 단종된 차들이지만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주연 못지않은 활약을 펼친 덕에 젊은 관람객에게도 낯설지 않을 듯하다.



서울에 택시와 버스가 다닌 것은 1920년대부터지만, 거리에 자동차가 많아진 것은 70년대 들어서면서다.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원과 브리사가 출시되면서 자동차 전성기가 시작됐다.
포니원보다 1년 앞서 출시된 브리사는 일본 차 마쓰다 패밀리아를 기본으로 기아차가 디자인한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송강호가 몰았던 브리사는 일본에서 구해 들여온 차량이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국내에서 수집한 국산 차라고 학예사는 귀띔했다.
맞은 편에는 서울 도심이 변화하는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서울 파노라마' 영상이 눈길을 끈다. 사진작가 고 김한영 씨가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남산의 한 장소에서 계속 찍은 사진들을 영상으로 편집했다.
서울 시내에 고층 건물이 속속 올라가면서 화려한 야경이 완성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핸드폰 시대가 도래하기 전 반짝인기를 끌었던 '삐삐'(무선호출기)와 시티폰, 부의 상징이었던 카폰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숫자만 전송할 수 있었던 삐삐는 90년대 공중전화 전성기를 이끌었고, 1717(일찍 일찍), 1010235(열렬히 사모) 같은 숫자 언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핸드폰에 밀려 자취를 감추면서 요즘 아이들에게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통신 유물'이 됐다.



◇ 혼수품부터 웨딩드레스 변천사까지
1천만 서울시민 중에서도 3대 이상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는 흔치 않다.
서울시는 1994년 한양 천도 600주년을 기념해 서울 토박이를 지정하는 사업을 벌였다. 1910년 이전부터 한성부에서 살았던 사람, 즉 '한양사람'의 후손만을 토박이로 인정했는데, 전체 서울 시민의 0.12%인 1만3천753명만이 서울 토박이 회원이 됐다.
2층의 '서울살이' 전시실은 이 서울 토박이들이 기증한 유물들로 꾸며졌다. 서울에 살았던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1950년대 웨딩드레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울 가족 탄생하다' 코너에서는 50, 60, 70, 80년대 각각 결혼한 네 커플의 기증품을 통해 결혼문화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50년대 결혼식은 전통과 서양식이 혼재된 모습이었다. 신부는 순백의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서양식 면사포를 쓴 채 부케를 들었다. 주례는 성혼선언문 대신 혼례 성사를 하늘에 고하는 고천문을 낭독했다.
축의금 대장을 보면 현금 대신 술이나 쌀을 몇 되씩 기증한 하객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혼여행은 깡통과 꽃으로 장식된 택시를 타고 남산과 한강 등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혼수품도 시대에 따라 변했다. 50년대에는 요강과 반상기가 주요 혼수품이었다. 요강에는 목화솜을, 반상기에는 찹쌀과 팥을 담아 보냈다.
60∼70년대에는 다리미와 재봉틀을 혼수로 장만했고, 80∼90년대 입식 생활로 변하면서 침대와 소파 등 가구가 등장했다.



◇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우량아로 기르자!
이어지는 '서울내기 나고 자라다' 코너는 출산과 육아 변천사를 보여준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가족계획 포스터와 우량아 선발대회 포스터다.
전쟁 이후 나타난 베이비붐 현상과 남아 선호 사상을 극복하기 위해 1970년대 도입된 것이 가족계획사업이었다. 당시 포스터에도, 주택복권에도, 우표에도, 피임기구에도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등장했다.
지금은 출산을 기피하는 풍조로 합계출산율이 1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1967년에는 출산율이 5.4명에 달했다. 한 집에 아이 대 여섯은 기본이었던 셈이다.
소아비만을 걱정해야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우량아 선발대회'도 낯선 풍경일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 부모들에게는 포동포동 살찐 우량아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첫 우량아 선발대회는 1946년 덕수궁에서 열렸다. 서울시가 주최하는 행사였다. 1970년대에는 분유 회사가 주도하는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는데, 매년 2만여명이 참여하고 TV 방송으로 중계될 정도로 인기였다고 한다.



◇ 예나 지금이나 치열한 입시경쟁
3층 '서울의 꿈' 전시실은 주택, 교육, 생업의 변천사를 다룬다. 서울 시민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배우고 일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학교 풍경 변천사를 담은 '배우고 경쟁하다' 코너가 특히 인상적이다. 교복도, 책가방도, 교과서도, 도시락도 시대에 따라 변모했지만, 입시경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입시경쟁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중학교도 시험을 치러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밤샘과외를 했고, 주소지를 가짜로 옮기는 위장 전입 현상도 등장했다. 신문사에서 호외로 발행한 중학교 합격자 명단은 중학교 입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준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되고 추첨제가 도입된 것은 입시 과열로 빚어진 '무즙 파동' 때문이었다. 엿을 만드는 과정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되는 것을 고르는 문제에서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학부모들이 소송까지 벌였던 사건이었다. 당시 학부모들은 법원에서 직접 무즙으로 엿을 만드는 시연을 하고, 교육청 앞에서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며 농성을 했다고 한다.
중학교 추첨에 사용했던 은행알 추첨기, 일명 '뺑뺑이'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학생들이 직접 추첨기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번 돌리면 추첨기 구멍으로 은행알이 나온다.
은행알에는 자신이 입학해야 할 중학교 번호가 적혀 있었다. 뺑뺑이를 돌리던 당시 추첨 현장의 생생한 모습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hisunn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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