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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광해 숨 거둔 날 유배지 제주선 가뭄에도 비오더라
음력 7월 1일 유배 중 숨져…비통함·측은함에 '광해우' 전설
삼복더위 식혀주고 바짝 마른 농경지에 활기 불어넣는 단비
2018-05-26 11:00:02최종 업데이트 : 2018-05-26 11:00:02 작성자 :   연합뉴스
남양주 광해군 묘

남양주 광해군 묘

[쉿! 우리동네] 광해 숨 거둔 날 유배지 제주선 가뭄에도 비오더라
음력 7월 1일 유배 중 숨져…비통함·측은함에 '광해우' 전설
삼복더위 식혀주고 바짝 마른 농경지에 활기 불어넣는 단비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제주에서는 삼복더위를 잠시 식혀주는 비가 음력 7월 1일이면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날은 광해가 1641년(인조 19년) 제주에서 유배 중 숨을 거둔 때다.
그는 개혁 군주에서 유배인으로 한 많은 삶을 제주에서 마감했다. 그를 추모하는 제주민의 마음이 가뭄 속에 단비가 돼 내린다는 믿음으로 전해온다.
음력 7월 1일 즈음 내리는 비는 여러모로 과거 제주민들에게 도움이 됐다.
이 비는 폭염을 잠시 식혀주는 청량음료 같은 존재다.
또 과거 농경사회 제주에서 주로 재배했던 보리를 가을 수확을 앞두고 더욱 싱그럽게 해줬다.


그래서 과거 아낙들은 여름 소나기가 내리면 고맙기도 하고 죽은 광해가 측은하기도 해 '광해우'(光海雨)라는 노래를 불렸다.
'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임금대왕 관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오람서라. 이여∼ 이여∼'
양진건 제주대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 교수는 "이 민요에서 '임금대왕'은 제주에 유배 온 유일한 왕 광해이며 '칠월이라 초하룻날', '관하신 날'은 그가 그날 붕어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가물당'은 '가물었다가도'라는 의미의 제주어이며 '비오람서라'는 '비가 오더라'라는 뜻이다.
양 교수는 "이 민요는 가뭄이 들어 말라 있는 대지를 광해우가 촉촉이 젖게 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광해에 대한 동정심과 동시에 은덕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음력 7월 1일이 있는 7월 말∼8월 중순 실제로 제주에 비가 내릴까.
조사 결과 이 시기 대기 순환 등의 이유로 소나기가 일시적으로 내리는 날이 많았다.
2014년 음력 7월 1일(양력 7월 27일) 전후 총 나흘간 1㎜의 비가 이어졌다.
2015년에는 음력 7월 1일 이틀 후인 양력 8월 16일 74.6㎜의 많은 비가 내렸다.
역시 음력 7월1일이었던 2016년(양력 8월 3일)과 지난해(양력 8월 22일)에도 강수량을 기록했다.
오봉학 제주지방기상청 예보관은 "7월 말에서 8월 중순까지는 고온다습한 북태평양고기압의 영향을 받는 기간"이라면서 "이 고기압대의 가장자리에 들게 되고 찬 공기가 유입되면 그 시기 대기 순환으로 소나기성 비가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조선의 왕에서 죄인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조 대표적인 지식인 4천여명 중 700여명이 유배형을 경험했다.
'벼슬에 오른 사람 치고 유배 길에 오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조선 시대 많은 지식인이 유배 길에 올랐다.
유배 거리는 죄인의 거주지로부터 유배지까지 2천리(785.4㎞), 2천500리(981.1㎞), 3천리(1천178㎞) 3등급으로 나눠 적용됐다.
죄를 무겁게 물수록 유배지의 거리가 멀었다.
조선 시대 전국적으로 유배지가 400여 곳에 달했는데 이 중 가장 먼 곳이 제주도였다.
조선 시대 법전인 '대전회통'에는 '제주에는 죄명이 특히 중한 자가 아니면 유배 보내서는 안 된다'라고 적혀있다.
제주로 오는 유배인에 대한 죄를 얼마나 중하게 물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 500년 동안 제주로 유배 온 이는 260여명이다.
광해가 임금에 오른 뒤 그의 이복동생 영장대군에 대한 시해를 반대했던 동계 정온도 광해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 왔다.
정온은 1614년 8월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돼 인조반정까지 10여 년간을 지냈다.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유배 생활을 한 정온은 주로 제주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의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은 제주시에 오현단을 세웠다.
오현단은 제주도 기념물 제1호다.
제주에서는 또 동계 정온과 더불어 충남 김정(중종 15년 유배),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중종 29년), 청음 김상헌 안무사(선조 34년), 우암 송시열(숙종 15년) 등 5명의 현인을 기리고 있다.
광해가 왕위에 있던 시절 정온과 이익, 이태경, 송상인, 광산 노씨부인(인목대비 어머니) 등이 제주로 유배왔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경복궁을 떠나 의주로 피신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전란에도 광해군은 평안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역을 돌며 의병을 독려했다. 민심을 수습하는 등 임진왜란을 극복한 데 큰 역할을 했다.
광해는 선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 직후인 1608년 왕에 올랐다.
광해는 세금제도 면에서 공납을 폐지하고 대동법을 시행했다.
공납은 가구별로 지방 특산물을 세금으로 걷는 것이다. 대동법은 특산물을 대신해 쌀로 통일해 지주에게 걷는 납세제도다.
공납은 지역 실정에 맞지 않은 데다 가구마다 과도하게 부과돼 사회적 문제가 많았다.
대동법 시행에 따라 소득을 많이 올리는 지주가 대동미라는 이름으로 세금을 냈다. 소작인 등 가난한 농민들은 세금 부담에서 벗어나게 됐다.
또 중국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후금(청나라)과 명나라 사이의 중립 외교를 펼쳐 전쟁이 휘말리지 않도록 실리를 따졌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해 일반 백성이 주위에서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임진왜란 때 불탄 궁궐을 무리하게 다시 지으면서 세금과 노역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광해의 지지세력인 이이첨, 정인홍 등 일부 북인 세력이 전횡을 일삼았고 공공연히 뇌물정치,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붕당정치 시대인 당시 광해와 지지세력인 북인의 반대편에는 서인들이 있었다.
서인 세력은 어머니를 죽이고 동생을 살해한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1624년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폐모살제는 광해의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그 어머니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을 의미한다.
인조반정으로 집권에 성공한 서인 세력은 광해에 대해 패륜을 저지른 이로 묘사하고 매관매직 등의 실정을 부각했다.
광해를 다룬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광해를 대동법을 시행하고 명과의 사대보다는 자주적 실리 외교에 힘쓴 조선의 유일한 개혁 군주로 다루고 있다.
역사 선생님 1천명이 뽑은 '다시 보고 싶은 역사 이야기' 1위로 광해군를 뽑기도 했다.
양진건 교수는 "광해는 패륜을 저지르는 등 실정이 있는 것은 맞지만 반면에 개혁 군주로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친 면도 있다"며 "역사에서 실정만 부각됐으나 높이 평가받을 점도 많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 가시덤불 둘러치고 자물쇠 채워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광해는 처음에는 강화도로 유배를 갔는데, 이곳에서 자식과 며느리, 폐위된 중전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년) 광해는 결국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광해는 제주에서 위리안치(가시덤불로 사방을 막는 형벌)를 당했고 철저한 감시 속에 생활해 왔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 4년간 유배 생활을 했으나 그리 기록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광해는 육로를 이용해 군산까지 간 후에 뱃길로 제주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배를 타는 동안 사방을 막아 광해가 밖을 보지 못하도록 했고 어디로 가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광해군을 실은 배는 1637년 6월 6일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포구인 '어등포'에 도착했다.
그는 해안에 도착해서야 제주라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으며 마중 나온 목사의 비난 섞인 말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제주와 다른 지방을 잇는 해상 주요 관문은 화북포구나 조천포구였다.
그런데 광해는 주요 관문보다 최소 18㎞나 더 동쪽으로 떨어진 어등포로 들어왔다.
양진건 교수는 "당일 날씨가 좋지 않아 화북이나 조천 포구로 들어오지 못해 어등포로 들어온 것 같다"면서도 "또 하나 비밀리에 그를 제주도로 유배하고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 주요 포구를 피해 다른 곳으로 들어왔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광해는 행원리에서 1박을 하고 중사, 별장, 내관, 도사, 대전별감, 나인 등을 따라 구좌읍 산간을 가로질러 지금의 변영로(97번 도로)를 따라 제주목으로 들어왔다.
가는 동안에도 사방이 막힌 가마 안에 가둬 제주 풍경을 보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했다.
광해는 제주목 관아 인근 거처에 위리안치됐다.
그러고도 밖으로 출입을 못 하도록 방문을 닫아 막고 자물쇠를 봉했다.
속오군 30여명은 교대로 광해군의 처소를 지켰다.
광해의 거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시 중앙로 82번지에는 그가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는 머릿돌이 있다.
유배 생활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으나 영감이라고 부르는 나인들의 무시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사견문록(효종 사위 정재륜이 기록한 책)에는 광해군은 궁비(나인)의 질타를 듣고 한마디 말도 없이 탄식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궁비의 패악하고 교만한 말에 분개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개혁 군주 광해에 대해 동정적이었고 측은하게 여겼다.
광해군을 쏘아붙인 나인에 대해 한결같이 분개하고 하늘의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여겼다.
1640년 이시방 목사가 부임하면서 이전 목사와 다르게 광해에 대해 애정을 많이 썼다.
이시방 목사는 광해가 6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직접 시신을 염해줬다고 한다.
광해군의 최후 기록이 담긴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이 위리안치된 가운데 61세 나이로 죽었다. 제주목사 이시방이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고 나와 있다.


유폐 생활 19년, 제주에 온 지 4년 만인 1641년 음력 7월 1일 광해군이 숨졌다.
이시방 목사는 제주 삼읍 수령에게 이 사실을 전해 모이게 하고 제주 출신 교생이 집사를 맡아 그해 음력 7월 4일 입관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인조는 조의를 표하고 예조참의 채유후를 보내 초상을 치르는 것을 맡아 보게 했다.
예조참의 채유후가 제주에 도착한 그해 음력 7월 27일 왕이 승하하게 되면 지내는 대제가 제주목 관덕정에서 거행됐다.
제주 사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왕실의 예례가 펼쳐졌다.
광해는 그해 8월 18일 시신으로 제주를 떠나 남양주시 건진읍에 묻혔다.
그가 숨을 거둔 후 제주에서 1개월, 남양주까지 가는 2개개월 등 총 3개월간 폭염에도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양진건 교수는 "당시 염하는 기술이 상당히 뛰어났을거 같다. 염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사료를 찾으며 더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kos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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