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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터뷰】 "수여선 철도와 뽕뽕다리 기억이 생생해요"
【수원시 승격 70주년 기념】 1960년대 출생 수원쟁이가 본 수원
2019-04-19 16:20:04최종 업데이트 : 2019-05-01 13:42:08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용도, 용도를 걸어 화양루 가는 길은 솔 향기 맡으며 걸을 수 있어 고즈넉한 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용도, 용도를 걸어 화양루 가는 길은 솔 향기 맡으며 걸을 수 있어 고즈넉한 길이다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가 편찬한 화성지 '건치연혁'에는 수원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지명은 매홀(買忽)이었는데 본뜻은 물골이다. 수원의 옛 지명답게 원래부터 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이 한자로 바뀌는데 이때 수성군(水城郡)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남정하여 견훤을 칠 때 이 지역 사람인 김칠, 최승규 등이 귀순해 힘을 다하여 공을 세우니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주(水州)로 승격했다. 이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부, 군 등으로 강등되기를 반복하는데 이 고을 사람들이 공을 세우면 승격되고 역적질을 하거나 적에게 항복하면 강등된 까닭이다. 조선 태종 12년(1413)에 도호부가 되었고 정조 17년(1793)에 유수영으로 승격해 처음으로 수원에서 화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1895년 수원군으로 바뀌었고 1949년 8월 15일 수원시로 승격하면서 수원과 화성이 분리되었다. 약 1000년 이상 수원의 중심지는 현재 융건릉이 있는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였다. 1789년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팔달산 동쪽에 관아와 화성행궁을 짓고 수원의 읍치를 이전한 것이다. 수원의 중심지가 팔달산 동쪽으로 바뀐 것이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원화성 성신사 앞, 팔달산 둘레길의 상춘객

수원화성 성신사 앞, 팔달산 둘레길의 상춘객

수원은 정조대왕 당시에 읍치를 이전하면서 신도시를 건설해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가 수원화성은 1970년대에, 화성행궁은 2000년대에 복원되었다. 수원은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시가 되었고 2003년 화성행궁이 복원되면서 역사문화 관광의 중심지가 되었다.

2019년은 수원시로 승격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60년대에 수원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보냈고 현재 수원에서 살고 있는 수원쟁이 고영익씨를 통해 수원의 현대역사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역사문화적인 관점에서 인터뷰를 했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 60년대에 태어나 자라면서 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기억나는 게 있는지요?

▲ 매교동에 살면서 매산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밴드부에서 나팔을 불었는데 종합운동장에서 학교까지 시가행진을 했었지요. 그 당시 매교동은 번화가였던 수원 남문에 비해 촌 동네 같다는 생각이 납니다. 수여선 철도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겨울에 썰매 꼬챙이를 만들기 위해 철로 위에 못을 올려놓았었지요. 매교다리, 뽕뽕다리, 광교풀장도 기억납니다. 그 당시에 수원천은 지저분해서 고기를 잡기도 힘들었지요.

- 윤주은 시인의 뽕뽕다리 연작시 중에서 '집 뒤로 수원천이 흐르고/ 그 건너 매교시장/ 그 사이를 가로질러 놓여있는/ 길고 먼 철근 한판/ 뽕뽕 뚫린 구멍마다 환히 켜지는 물소리/ 발목을 잡아당기던 다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어린 시절의 뽕뽕다리가 꽤나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 저와 초등학교 동창인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도시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고 수원천 옆으로 수여선 철도가 있었기 때문에 기찻길과 수원천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나지요. 
1960년대에 수원에서 태어나 자라고 현재 살고있는 수원쟁이 고영익씨

1960년대에 수원에서 태어나 자라고 현재 살고있는 수원쟁이 고영익씨

- 80년대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생 시절을 보냈는데 그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는지요?

▲ 매교동에서 북중학교, 수원고등학교로 통학했는데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남문에는 가지 말라고 했던 생각이 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외서클활동을 했는데 문학토론을 통해 나만의 정체성을 확립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90년대 청년기는 어떻게 보냈는지요?

▲ 386 중심세대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시기였지만 80년대 후반 IMF를 기점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지요.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수원이 역사문화도시로 부각하기 시작했고 수원이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수원이란 고도(古都)에 새로운 개념의 현대적 모습이 추가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수원화성 성곽 안과 화성행궁은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 본인을 수원쟁이로 소개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 고향이 역사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해 가는 것을 보면서 공예작가, 역사 선생, 연극인의 삶으로 역사문화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수원은 역사문화 콘텐츠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확장, 발전이 안 되고 정체된 듯해 답답합니다. 지역의 콘텐츠를 살리지 못하고 콘텐츠가 정치논리로 움직이면 외적, 양적 팽창은 있겠지만 자생적 바탕이 없어 내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역사문화 콘텐츠의 내적인 가치가 충분히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원쟁이 고영익씨와 술잔을 기울이다보면 수원화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 거중기, 유형거를 재현 제작하는 공예작가, 연극인으로서의 삶이 온통 수원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기자로서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술자리는 밤이 깊어가도록 계속된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의 술자리는 즐겁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

수원시 승격 70주년, 수원쟁이, 고영익,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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