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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장춘각은 어떤 용도였을까
교방보다 군사시설일 가능성 높아
2019-06-03 20:45:49최종 업데이트 : 2019-06-17 14:06:09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화성행궁 낙남헌 앞 서쪽, 팔달산 방향에 장춘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행궁 낙남헌 앞 서쪽, 팔달산 방향에 장춘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은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겼다. 그곳에 있던 읍치를 팔달산 동쪽으로 옮기면서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 활용되었지만 정조대왕이 현륭원을 방문할 때마다 머무른 중요한 공간이었다. 정조대왕은 1789년부터 1800년까지 13차례 현륭원을 방문했고 1795년 윤2월에는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8일간 방문하면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현륭원 참배, 진찬연, 과거시험, 야조, 양로연 등의 행사를 열었다.

화성행궁은 576칸의 정궁형태로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일제강점기에 역사 문화적으로 열등감을 가진 일제는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시설물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화성행궁은 1993년부터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했고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10월 1단계 복원공사를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 됐다. 482칸으로 복원된 화성행궁은 2007년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고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한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원시는 화성행궁의 완벽한 복원을 위해 2016년부터 화성행궁 2단계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화성행궁 좌우영역에 있던 '별주(분봉상시)', '장춘각', '우화관'의 발굴조사를 진행해 우화관 건물 터와 별주 터를 확인했다. 발굴조사를 마친 후 2020년부터 화성행궁 2단계 복원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화성행궁 낙남헌 앞 서쪽에 있던 장춘각

화성행궁 낙남헌 앞 서쪽에 있던 장춘각

발굴조사 과정에서 장춘각 터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낙남헌 앞 팔달산 방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춘각은 용도도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장춘각에 대한 기존의 기록과 장춘각의 용도를 유추할 수 있는 새로운 기록을 검토해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알아보자.

장춘각(藏春閣)에 대한 기록은 '화성성역의궤 부편1 행궁'에 낙남헌을 설명하면서 '서쪽 담장 안에는 장춘각 5칸이 있는데 이것은 옛날에 세운 것으로 역시 푸른 병풍으로 경계를 삼는다'라고 기록했다.

일성록 정조 19년(1795년) 윤2월 12일 '내가 갑주를 갖추고 낙남헌(洛南軒)에 나아갔다. 하루 전날, 장용외사(壯勇外使) 조심태(趙心泰)가 나의 뜻을 여쭈어 군령(軍令)을 청하고 원문(轅門)에 내걸었다. 때가 되자 내가 행궁 문을 나와 장춘각(藏春閣) 앞길을 경유하여 장대에 이르러 단(壇)에 올랐다'라는 기록과 '복숭아 접목과 은행 접목 도합 11그루를 장춘각(藏春閣) 동쪽 뜰에 심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에서 장춘각의 규모와 위치는 추정할 수 있지만 용도에 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에는 행궁 건물에 이름이 붙어 있지만 장춘각으로 추정되는 건물에는 아무런 이름도 없다.1872년에 간행한 평안도 안주목지도(安州牧地圖)의 안주성 내에 있는 장춘각

1872년에 간행한 평안도 안주목지도(安州牧地圖)의 안주성 내에 있는 장춘각

 
일성록 정조 14년(1790년) 5월 7일자에 '수원부 읍치에 새로 건립한 공해는 득중정 9칸, 진남루 6칸, 좌익문 3칸, 강무당 16칸, 와호헌 15칸 반, 미고 5칸, 비장청 15칸, 향청 19칸, 고사 42칸, 어승마마구 10칸, 군기대청 6칸, 군기총검고 5칸, 명륜당 10칸, 집사청 24칸 반, 초관청 17칸, 방영군관청 12칸, 토포군관청 19칸 반, 별효사청 6칸, 작청 28칸, 영선 10칸, 교방 6칸...<후략>'이라 기록했다. 교방을 6칸이라고 했다.

1793년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전영지의 신읍영건공해간수성책'에는 '교방 10칸, 더 지어 개건함'이라 기록하고 이 기록에 대한 해설에서 「교방이란 관기가 기예와 음악을 연습하는 장소를 지칭한다. 수원부읍지에는 비슷한 위치에 10칸 규모의 건물로 장춘각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추측해보면 장춘각은 교방의 편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를 달았다. 단지 건물의 규모가 10칸으로 같다는 이유로 장춘각을 교방으로 추정한 것이다.

1800년대 중반에 편찬한 제주읍지 '공해(公廠)'편에 장춘원(藏春院)을 교방(敎坊)이라고 했는데 '장춘(藏春)'이란 두 글자가 같다는데서 화성행궁 장춘각을 교방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도에 대한 기록이 없다보니 상상력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1872년에 간행한 평안도 안주목지도(安州牧地圖)의 안주성 내에 있는 장춘각

1872년에 간행한 평안도 안주목지도(安州牧地圖)의 안주성 내에 있는 장춘각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수원부읍지 5권 중에서 1791~1792년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부읍지 '관해(官廠)' 편에 장춘각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장춘각은 장남헌(현 봉수당)의 서북쪽에 있고 10칸이다. 이 기록은 화성성역의궤의 5칸이라는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교방도 6칸, 10칸이라는 차이를 보인다. 기록이 왜 차이를 보이는지 명확하게 알기는 힘들고 추측하기도 어렵다. '공해(公廠)', '관해(官廠)'란 관아건물을 말한다.

1872년에 간행한 평안도 안주목지도(安州牧地圖)가 있다. 지도 중심에는 안주성이 그려져 있다.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8호로 고구려시대의 성곽이다. 안주성은 내성, 외성, 신성 등 3구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축성 시기는 내성은 고구려 때, 외성은 조선 초기, 신성은 17세기에 쌓은 것이다.

안주성 내성 안 관아건물 중에 장춘각(藏春閣)이란 건물이 있다. 화성행궁 안에 있던 장춘각과 한자도 똑같다. 1832년에 편찬한 안주목지(安州牧志) '공해(公廠)'편에도 장춘각이란 명칭이 보이는데 뜻밖에도 건물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1832년에 편찬한 안주목지(安州牧志) '공해(公廠)'편에 장춘각은 병영에 속하는 공해라 기록했다.

1832년에 편찬한 안주목지(安州牧志) '공해(公廠)'편에 장춘각은 병영에 속하는 공해라 기록했다.

'비장청, 본영청, 장사청, 집사청, 별무사청, 난후사청, 토포청, 육방청, 진무청, 영리청, 통인청, 관노청, 장춘각, 군뇌청은 병영(兵營)에 속한 공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성행궁과 안주성은 시대와 장소가 다르지만 동일한 명칭인 장춘각이 병영에 속한 관청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인데 군사시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낙남헌 앞에 있는 건물이 관기가 기예와 음악을 연습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보기보다는 행궁을 호위하는 군사시설이 있었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고봉 기대승(1527-1572)의 고봉집에는 '장춘정기(藏春亭記)'가 실려 있다. 유중한이 죽포에 정자를 세워 장춘정이라 하였고 여러 명승지에 대해 쓴 시편을 판각해 편액을 걸었다. 기대승의 기문을 걸어놓으려고 하자 장춘정기를 쓴 것이다. 기대승이 유중한에게 1년의 봄은 3개월에 그칠 뿐인데 '장춘'이라 지은 연유를 묻자 장춘(藏春)이란 봄을 감추어 보관하였다는 뜻이라고 했다.

장춘정을 지은 유중한이 송나라 조경순이 장춘오(藏春塢)를 만들자 소동파가 장춘부(藏春賦)를 지어 '나이는 조화의 도견 밖에 버리고 봄은 선생의 장구 안에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장춘정이라 이름 지은 내력을 밝혔다.화성행궁 득중정, 낙남헌 옆 건물로 정조대왕이 활쏘기를 하던 곳이고 왼쪽 언덕에 장춘각이 있었을 것이다.

화성행궁 득중정, 낙남헌 옆 건물로 정조대왕이 활쏘기를 하던 곳이고 왼쪽 언덕에 장춘각이 있었을 것이다.

기대승은 성리학적 관점에서 사람의 성정은 비록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 따라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각기 다른 명칭이 있으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관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사람이 만일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진리를 알아 돌이켜 찾는다면 감춰 둘 수 없던 봄이 진실로 나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장춘(藏春)이란 봄을 감추어 보관하였다는 뜻이지만 그 속에 삼라만상 우주 진리가 들어있는 심오한 말이다.

정조대왕은 1795년 윤2월 낙남헌에서 과거시험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했고, 양로연을 베풀었다. 낙남헌 옆 건물인 득중정에서는 활쏘기를 했다. 1796년 10월 16일에는 수원화성 준공을 축하하는 낙성연이 열렸다. 낙남헌은 이렇듯 중요한 행사가 열린 공간이고 장춘각은 바로 그 앞에 있던 건물이다. 장춘각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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