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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단'에 참여한 우리동네 영웅 '석성근 氏'
일곱 발의 총성, 세 번의 외침을 남긴 안중근 의사 유해는 어디에
2020-03-18 00:27:42최종 업데이트 : 2020-06-01 10:51:06 작성자 : 시민기자   곽기주
성근 씨가 뤼순감옥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컴퓨터 화면은 뤼순감옥 정문 사진이다.

석성근 씨가 뤼순감옥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컴퓨터 화면은 뤼순감옥 정문 사진이다.

효창공원은 독립운동가의 성지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독립운동가 일곱 분이 안장되어 있고 비어 있는 무덤이 하나 있다. 바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임시 묘이다. 일본은 사형 집행 후 뤼순감옥 인근에 안중근 의사 시신을 임시로 안장했다.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이 유해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끝내 거부했고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유해 매장지 기록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던 중 당시 뤼순감옥 형무 소장 딸인 이마이 후사코 씨가 제공한 사진 2장과 증언을 단서로 2008년 3월 박선주 충북대 교수(당시 충북대학교 박물관장)를 단장으로 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단이 구성됐다. 이 과정을 춘천 MBC가 다큐멘터리 <안중근, 북위 38도>로 제작하여 방영되기도 했다.

이 발굴단에 참여한 석성근 씨(57세, 기산동)를 영통동 벽적골 인근에서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만났다. 석성근 씨는 2018년 10월부터 영통에서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 결식아동 꿈나무카드, 컬러풀드림카드를 보여주면 고기를 좀 더 넉넉하게 주는 정 많은 사장님으로 인근에서 유명했다.
 

뤼순감옥 정문[석성근 씨 사진제공]

뤼순감옥 정문[석성근 씨 사진제공]

-발굴단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경희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후 청주에 있는 명문건설주식회사 건설사업부 기술이사로 재직하던 중 박선주 단장(당시 충북대학교 박물관장)의 요청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단에 참여하게 됐어요." 

발굴에는 지형을 읽는 것이 중요한데 토목이 그 역할을 하고 사진으로 추정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는 것. 대학시절 당시 항공측량학에 관심이 많아 사진과 지형의 오차를 줄이는 부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공부했는데 그게 도움이 됐다했다.

마침 안중근 유해 발굴단 단장인 박선주 교수가 이마이 후사코 씨가 제공한 사진 두 장으로 발굴 위치 추정이 필요하다 요청했고, 박교수와 친분이 있는 사진동호회 회원이 석씨를 추천해 이뤄졌다.
"일제시대부터 사용되던 필름카메라와 1:1디지털카메라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참여 인원으로 선택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석성근 씨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과 북한이 2004년부터 유해 발굴 신청을 중국에 해왔다고 한다. 중국은 한국의 능력이 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해 허가를 내주었단다.

발굴단은 박선주 교수를 단장으로 대학원생 6명과 석성근 씨를 포함해 총 9명으로 구성됐다. 통역은 조선족, 인력이 필요하면 중국인을 동원했다. 뤼순감옥 근처는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공안의 허가없이는 출입이 불가능했던 곳. 언제나 공안이 숙소까지 동행했고, 현장에 상주하면서 통제를 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 유해가 옮겨졌을 거라고 추정되는 북대문 [석성근 씨 사진 제공]

안중근 의사 유해가 옮겨졌을 거라고 추정되는 북대문 [석성근 씨 사진 제공]
 

- 발굴 참여 기간은 어떻게 되나
"2008년 3월 중순경 중국 다롄공항을 통해 뤼순감옥에 발굴본진이 먼저 이동했고, 저는 1차 지표조사가 끝난 3월 말에 가서 4월 10일에 귀국했어요. 박선주 교수와 실무진은 4월 30일에 발굴 종료가 아닌 발굴 일시 중단을 선언한 후 귀국했어요. 이 기간 동안 이동, 발굴 자체를 중국 공안이 항상 감시하고 모든 행위는 상부의 허가를 받았어요."
 

유해 발굴 현장에서 지형 측정을 하는 석성근 씨 [ 춘천 MBC 다큐멘터리 '안중근, 북위 38도' 화면]

유해 발굴 현장에서 지형 측정을 하는 석성근 씨 [ 춘천 MBC 다큐멘터리 '안중근, 북위 38도' 화면]


- 발굴 위치는 어떤 방식으로 추정했나

"이마이 후사코 씨가 제공한 사진을 토대로 현재 지형과 과거 지형을 비교하면서 위치를 추정했어요. 정확도를 위해 그 당시에 찍은 구형 카메라를 구해 똑같이 찍고 이후 현재 위치로 역추정하면서 매장지 위치를 찾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요. 그곳이 뤼순감옥 북문 뒤였어요."

발굴작업은 쉽지 않았다.  매장 추청 위치인 뤼순감옥 북문 뒤쪽 땅 지형은 변함이 없었지만, 재개발로 모두 파헤쳐졌고 표면 흙이 유실된 상황이었다. " 발굴 전 고사까지 지내면서 매장 추정지만 훼손 안 되게 해달라 빌었는데 매장 추정지가 더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어요." 범위를 넓혀 진행했지만 생활 쓰레기, 깨진 그릇, 탁자 같은 가구 폐기물만 발견됐다. 

안중근 의사 독방 외부 [석성근 씨 사진 제공]

안중근 의사 독방 외부 [석성근 씨 사진 제공]
안중근 의사 독방.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순국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썼고 그 당시 사용했던 책상, 붓, 벼루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석성근 씨 사진 제공]

안중근 의사 독방.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순국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썼고 그 당시 사용했던 책상, 붓, 벼루 등이 보관되어 있다.내부는 출입금지라 창 밖에서 찍었는데 빛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석성근 씨 사진 제공]

-유해 발굴에 실패한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중국이 재개발을 시작하면서 당시 인골이 많이 훼손됐고, 인골을 처리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어요. 훼손시켰다, 모른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두려워해요. 한국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계속 기억되고 무덤이 한국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걸 두려워했어요."

 

안중근 유해 관련 기밀 문건 제 14조 안중근 사후 처리에 관한 건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안중근 사형 집행 후 한국인들은 그 유해를 인수해 하얼빈 한국인 묘지에 매장하고 묘비와 기념비를 세워 애국 지사로서 숭배와 존경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만약 안중근의 유해가 유족의 손에 인도될 때 조심하지 않으면 위 계획이 실현될 것이다. 이는 우려할 일이므로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감시가 쉽게 Y자형으로 건설된 뤼순감옥 내부 [ 석성근 씨 사진 제공]

감시가 쉽게 Y자형으로 건설된 뤼순감옥 내부 [ 석성근 씨 사진 제공]

고문 틀 [석성근 씨 사진 제공]

고문 틀 [석성근 씨 사진 제공]

석성근 씨는 일본은 지금도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비하하고 있다면서 일본 측에 구체적인 자료가 있을 것 같지만 두려움 때문에 자료가 있어도 안 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앞으로 특별한 다른 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추가 발굴 작업은 힘들 것 같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석씨는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지 안중근 의사를 덮어버리려고 하고 중국은 안중근 의사를 인정하면서도 자기 후손이 아니므로 한걸음 뒤에 있는 느낌"이라 말했다. 

중국이 땅이 훼손되기 전에 손을 내밀었다면 좋았을 거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유해 발굴 시도를 안 했으면 국가적으로도 후회되는 일이었을 거라면서 실패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석성근 씨 사진 제공]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석성근 씨 사진 제공]

2020년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작업에 새로운 실마리가 될 자료가 나오기를 바란다.

 

 

* 이 기사는 2020년 영통마을신문 봄호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발행이 연기되어 E수원뉴스에 먼저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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