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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기행을 마치고(하)
2008-06-26 11:46:03최종 업데이트 : 2008-06-26 11:46:03 작성자 :   김덕녕

백두산 기행을 마치고(하)_1
김약연 선생
간도의 용정은 근대 우리역사에 큰 획을 긋는 성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다. 
간도를 빛낸 한인 대통령으로 불리는 규암 김약연에 대하여 '보훈의 달' 6월이 가기 전에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에 살던 김약연은 주민 25가구 142명을 이끌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용정으로 이주한다. 
청나라 지주로부터 땅 600만평을 매입해 둥지를 튼다. 마을이름을 명동(明東․동쪽을 밝힌다)으로 바꾼 뒤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간다. 

이들이 맨 먼저 시작한 일은 교육사업이다. 김약연은 1901년 '규암재'라는 서당을 설립한다. 
규암재는 이후 명동서숙-명동학교로 발전하며 명동촌 교육의 효시가 된다. 이후에는 명동중학교, 명동여학교, 창동학교, 정동학교를 잇따라 병설하며 교세를 확장한다. 
별도 학전(學田)을 확보하여 김약연은 물론 선생과 학생모두가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학교를 꾸려간다. 1908년부터 1925년 중학부가 폐쇄될 때까지 1,000여명의 학생을 매출하며 간도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금년은 명동학교 창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시인 윤동주, 문익환 목사 등도 이 학교에서 배출된다. 
일제 강점기 명동촌은 단순한 한인 마을이 아니었다. 그곳은 민족교육의 산실이고 독립군의 병영이자 군인양성소였다. 
당시 명동중학교에는 학생 독립운동단체인 '학우회'가 조직되었으며 '충열대'라는 학교연합조직을 결성하기도 한다. 
1918년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여파는 즉시 간도 한인 사회에 파급된다. 
특히 명동학교 출신들은 용정의 1919년 3.13만세 시위운동을 이끌며 평화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만 일제의 무차별적인 총칼 앞에 수많은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강대국 특히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별 소득 없이 끝나자 결국 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으로 방향전환(독립전쟁론)을 하게 된다. 
따라서 1919년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15만원 탈취사건' - 철혈광복단(명동중학 중심의 청년단체)은 무기구입을 위해 연변조선인으로부터 의연금을 모아 구기구입을 시도해 보았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모금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보안유지 문제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철혈광복단원들은 고심하던 중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1919년 11월 조선은행 회령지점에 지하비밀단원으로 입행(入行)하여 활동하고 있던 전홍섭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 일본영사관에 반일시위 진압을 위한 경비 15만원을 송금한다는 것이다. 
철혈광복단원 윤준희 등 6명은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하고 15만원(당시임금 일당 1원) 탈취계획을 면밀히 짰다. 1920년1월3일 이른 새벽부터 윤준희 등은 눈 덮힌 벌판의 보호색인 흰옷으로 변장하고 경비호송대가 지나갈 길목에 매복을 하고 추위와 싸워가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해가 지고 어둠의 장막이 내린 밤8시경에 돈을 실은 마차의 앞뒤로 호송경관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철혈 광복단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단숨에 해치웠다. 

날이 밝기 전 농부로 가장하여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무기구입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1월4일 일본영사관은 수백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수색작전을 펴고 명동마을에 들이 닥쳐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체포 연행하고 학살하였다. 
윤준희 등은 체코군과 러시아 백군파 무기상과 비밀 무기거래협상을 추진하여 총 3만자루를 구입하려고 했다. 
이 협상이 성사만 되면 연해주에 머물고 있던 500여명의 항일전사와 연변의 반일전사들을 완전히 무장시켜 대일본 무력투쟁을 활발히 전개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뜻밖의 일이 터진다. 윤준희가 무기구입 알선을 위해 내세웠던 사람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항일투쟁단체에 위장하여 들어왔던 일본 첩자 엄인섭이었다. 
주구 엄임섭의 밀고로 윤준희 등이 투숙한 여관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다. 
윤준희와 다른 동지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500여명의 조선인 반일전사도 일망타진되어 일본군함에 실려 청진감옥으로 압송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군자금조달을 위한 15만원 탈취사건은 비록 실패로 끝나지만 만주조선인 사회에서 독립쟁취 열망과 특히 독립전쟁을 통해서 국권회복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와 정신이 이어져 홍범도, 김좌진 장군에 의한 봉오동과 청산리전쟁의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특히 규암은 1912년 북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기구인 '간민회'를 결성, 이주 한인의 구심체 역할을 한다. 
또한 간민회 회장으로 한인촌락을 하나 둘 독립운동 단체로 조직해간 그는 스스로 실천적 항일 운동에 뛰어 든다. 
김약연은 함경북도 무관 집안출신으로써 무오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해 용정의 3.13만세 시위를 이끌며 무기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여 명동학교에 무기를 감추어 놓았다는 혐의로 1920년에는 일본군에 의해 민족교육의 산실 명동학교는 애석하게 불태워 진다. 
명동학교는 교장 김약연이 손수 벽돌을 찍고 교사, 주민들과 함께 쌓아 올린 건물이었다. 
이국 땅 신천지 개척자로 간도 한인사회 대통령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자로 한평생을 바치신, 1942년 75세를 일기로 별세한다. 김약연은 눈을 감으면서 "나의 일생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백두산 기행을 마치고(하)_2
민족의 한을 안고 흘러가는 두만강

6월4일 오후엔 화룡현으로 이동하여 발해 정효공주 묘를 답사한다. 
용정시 남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너른 벌판 가운데 해란강이 눈에 들어온다. 
해란강가에 말달리던 선구자는 보이지 않지만 한가롭게 빨래하는 아낙만 보인다. 

두도평야는 해란강 유역의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다. 
시골로 들어서도 조선족과 한족 민가 건물이 반반 눈에 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용두산의 정효공주 무덤 건물이 보인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발해유적지에 대해서도 외부인, 특히 한국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우회하여 저들의 눈을 피해 도착하였다. 
정효공주 묘비문에는 그의 아버지 문왕을 '황상(皇上)'으로 표현한 대목이 있다. 
이것은 황제와 동일한 의미로서, 발해가 황제국을 표방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대목이 있다. 따라서 발해가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였다는 중국학자들의 견해는 타당성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그들 역사의 범주를 현재의 중국영토 안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 모두로 잡고 있다. 
고구려, 발해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존재했었던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침탈을 통하여 중국사의 일부로 다루고 있다. 
우리의 고대사는 이러한 논리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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