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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 of Mongolia] ② 칭기즈칸의 고향
2019-10-12 08:01:03최종 업데이트 : 2019-10-12 08:01:03 작성자 :   연합뉴스

(델게르항[몽골]=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초원을 뒤덮고 있던 검은 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치자 무지개가 나타났다.
조각난 무지개를 쫓아 달리다 보니 완벽한 반원의 무지개가 환상적인 터널을 만들어줬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서 벌어진 마법 같은 일이었다.
◇ 무지개를 쫓아가는 길
본격적인 장도(長途)가 시작됐다.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서느라 배도 고프고 피곤했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과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날씨는 오락가락했다. 잔뜩 찌푸렸다가 반짝 햇빛이 비치고, 앞이 안 보이게 비가 쏟아지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마주 오는 차는 드물었고, 출렁이며 달리던 미니버스가 속도를 늦추고 경적을 울리는 건 느릿느릿 움직이는 소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였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행이 급히 차를 세웠다. '끝내주는 풍경'이라며 차에서 내렸다. 멀리 촉촉하게 젖은 초록 벌판 끝에서 크고 선명한 무지개가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망원 렌즈가 없었기에 뛰어야 했다. 무지개가 시작되는 곳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그 와중에도 대접만 한 소똥, 말똥은 용케 피했다. 평소 달리기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낯선 흥분이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무지개 아래서 풀을 뜯던 소들이 고개를 돌려 멀뚱히 쳐다봤다.
다시 차에 탄 뒤에도 이런 행운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더욱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각난 무지개가 길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번갈아 나타났다. 낮게 깔린 거대한 구름 속에서 땅으로 내려온 다리 같았다.
그러다 마침내, 해가 서쪽으로 거의 기울었을 무렵 완벽한 반원의 무지개를 마주했다. 정확히 우리가 달리는 길 위로 거대한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망원 렌즈는 물론, 광각 렌즈도 없었기에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설픈 파노라마 촬영 탓에 찌그러진 모양새로 남았지만, 생애 가장 환상적인 무지개가 될 것은 틀림없었다.
◇ 유목민의 환대
헨티주의 주도 은드르항이 가까워지자 버스가 잠시 멈췄다. 은드르항 입구 고속도로 위에 세워진 구조물은 '칭기즈칸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고 있다. 은드르항은 도시 이름도 '칭기즈 시'로 바꾸고 표지판도 함께 세워놨다.
실제 칭기즈칸이 태어나 자란 곳은 헨티주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북쪽 끝 다달 솜(군에 해당)으로 알려져 있다.
초원뿐이지만, 헨티주는 칭기즈칸의 탄생지이자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처음 일으킨 곳으로, 몽골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다.
빛깔 고운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여성이 일행을 맞으러 나와 있었다. 하늘색 천을 양손에 늘어뜨려 잡고 그릇에 담긴 막대기 모양의 과자를 내밀었다. 하늘색은 몽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예를 갖추는 의미라고 한다.
우유를 발효시킨 뒤 건조해 만든 아롤은 몽골 사람들이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환영의 의미로 내는 간식으로 거절해서는 안 된다. 텁텁하면서도 침샘을 자극하는 시큼한 맛에 놀라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김치를 맛보고 매운맛에 놀라는 외국인을 보고 흐뭇해하는 한국 사람처럼, 처음 먹어보는 아롤 맛에 놀라는 한국인을 보고 몽골 사람들이 웃었다.
◇ 유목민의 자존심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에게 말(馬)은 역사이자 문화이고 생활이다. 또 자존심이다. 몽골의 아이들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말을 탄다고 한다. 헨티주 서쪽 델게르항에서 만난 말을 키우는 유목민 가족의 막내 볼로루(4)도 그랬다.
아직은 혼자서 말에 올라타지 못하는 볼로루는 형들과 어른들이 말을 타는 동안 자신을 태워주지 않는다며 아빠의 옷자락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어른들이 이리저리 말을 몰고, 우르가(올가미가 달린 장대)를 이용해 달려가는 말을 붙잡아 쓰러뜨리거나 말 등에 매달린 채 땅바닥에 놓인 우르가를 잡아 올리는 시범을 다 보여준 뒤에야 볼로루 차례가 왔다.
아빠가 번쩍 들어 올려 말 등에 태워주자 칭얼거리던 볼로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 됐다. 혼자서 그 작은 손으로 고삐를 쥐고 달리는 것은 물론, 어른들과 함께 성난 말들을 몰이하는 데 끼기도 했다.
유제품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다른 유목민 가족의 남자 아기 역시 이름이 테무친이다. 테무친의 할머니는 아침부터 게르 안의 난로에 우유를 끓이고 있었고, 손님들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수테차와 우유로 만든 간식거리들을 내놨다.
할아버지는 자신과 똑 닮은 테무친을 안고 빗속에서 가축들을 돌아보고 와서는 할머니와 함께 천 주머니에 우유를 걸러내 기둥에 매달았다. 천 주머니 안의 건더기가 아롤로 만들어질 것이다.
순한 테무친은 낯선 손님들 틈에서 울지도 않고 이 품에서 저 품으로 옮겨 안겼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면서 그치지 않았다. 오전 내내 그 빗속에서 말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옷과 신발은 축축이 젖고 슬슬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늦은 점심시간, 유목민의 게르로 자리를 옮기니 마침내 허르헉이 나왔다. 양고기를 토막 내 뜨겁게 달군 돌과 함께 오랜 시간 쪄내는 전통 요리다. 양은 유목민에게 귀한 재산이고, 만드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잔치가 열리거나 손님이 왔을 때 내는 귀한 요리다.
다들 손으로 뼈째 들고 고기를 뜯었다. 한기가 든 속을 데우려면 뜨끈한 국물이 간절했지만, 뜨거운 돌이 대신했다. 솥에서 꺼내 어느 정도 식힌 돌을 양손에 번갈아 쥐고 있으면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건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에는 양고기 기름과 냄새가 남았고, 돌에서 손으로, 다시 손으로 전해진 온기는 마음에 남았다.
◇ 은하수와 별똥별이 흐르는 밤하늘
여정 내내 흐리고 비가 온 탓에 별이 흩뿌려진 몽골의 밤하늘을 보지 못하다가,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머문 헨티에서 드디어 마주했다. 완벽하게 맑은 날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별과 은하수가 초원의 까만 밤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조리개를 열어 놓고 잠시 수다를 떤 뒤 확인한 카메라 액정에는 별똥별의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일행들은 운이 정말 좋다며 함께 기뻐해 줬다.
언제까지라도 고개를 뒤로 꺾고 입을 벌린 채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에서 타는 듯 붉은 달이 솟아오르더니 어느새 땅을 환하게 비췄고 별은 이내 스러졌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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