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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 쉼이 있는 여행 ① 안동 맹개마을
2020-10-08 09:55:37최종 업데이트 : 2020-10-08 07:30:13 작성자 :   연합뉴스

자연을 벗 삼아 느리게 사는 삶…퇴계가 읊었던 그림 속으로
(안동=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가을색이 짙어가는 10월,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은 특별한 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
경북 안동의 오지 맹개마을에서 보낸 하루는 오롯한 휴식이었다.
맑은 자연을 그대로 담은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느리게 사는 삶을 잠시나마 누려봤다.
◇ 산 넘고 물 건너…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은 퇴계 이황(1501∼1570)이 어린 시절부터 즐겨 다녔던 길이다.
1564년 어느 날, 퇴계는 13명의 지인을 초대해 도산서당에서 청량산으로 향하면서 맹개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친구인 이문량에게 시를 써 보냈다.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님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맹개마을은 퇴계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읊었던 바로 그 마을이다.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청량산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로 둘러싸여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비경을 품고 있는 이 마을은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오지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마을로 건너갈 수 있는 교각은 물론, 사람이 다니는 돌다리도 없다.
마을 주민은 14년 전 귀농한 박성호 씨(농업법인 밀과노닐다 대표) 부부와 그들의 지인 권선하 씨가 전부다.
지루했던 장마와 태풍이 지나고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 9월의 어느 날, 맹개마을로 향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 넘게 달리니 청량산이 자태를 드러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절경이 탄성을 자아낸다.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산골짜기로 깊숙이 들어가니 농암종택이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온 박성호 대표가 종택 앞 강변 둔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맹개마을을 찾는 여행객은 박 대표가 몰고 온 트랙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유난히 길었던 장마와 엄청난 비를 뿌린 태풍 탓에 강물이 불어 배로 강을 건너야 했다.
맹개마을로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덜컹거리는 트랙터 대신 유유히 물길을 가르는 배 위에 몸을 싣고 퇴계가 읊었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맹개마을에 거의 다다르면 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를 만나게 된다. 흐르는 강물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뒤를 돌아보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장관이다.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 중 남쪽 끝자락에 있는 축융봉의 '학소대'다. 예로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거칠게 내려오던 강줄기가 학소대를 돌아 완만해지면서 흙을 실어 놓는 곳에 맹개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퇴계는 학소대와 맹개마을 사이에 우뚝 솟은 바위를 경암이라 부르면서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한다.
부딪는 물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
물 가운데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
인생의 발자취란 허수아비 같은지라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다리 세워 버텨보랴
뱃소리를 듣고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은 거위 세 마리와 견공 토리였다. 박 대표와 함께 마을을 지켜 온 터줏대감들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외지인이 반가운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멍멍' '꽥꽥' 목청을 높인다.
배에서 내려 마주한 마을의 모습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산속에 포근하게 안긴 메밀밭은 이제 막 하얀 꽃망울을 드문드문 터뜨리기 시작했다.
예년 같으면 9월 초순 메밀꽃이 만개하지만, 올해는 길어진 장마 탓에 파종이 늦어져 10월 초에나 새하얗게 뒤덮인 꽃밭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드넓게 펼쳐진 메밀밭 주변에는 몇 채의 건물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묵어가는 펜션 '소목화당'과 박 대표 부부의 보금자리인 흙집, 수확한 밀과 메밀을 저장하고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밀그리다' 공방, 밀로 빚은 술을 숙성시키는 토굴 '술 그리다', 농가 음악회가 열리는 돔하우스…
이 모든 것에는 박 대표가 맹개마을에서 보낸 14년의 세월이 녹아 있다.
◇ 도시 생활 훌훌 털고 자연 속으로
서울에서 IT 관련 사업을 했던 박 대표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2007년이다. 스트레스와 술에 찌든 삶에 염증을 느껴 다른 길을 모색하던 때였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맹개마을은 그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갔다.
당시 이곳은 수도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척박한 땅이었다.
한때 이 마을에 살았던 대여섯 가구조차 불편을 견디지 못해 떠나고 쓰러져가는 초가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마을의 모습이 어쩌면 그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의 사업체를 정리하고 이곳으로 내려온 그는 버려진 초가를 베이스캠프 삼아 생활하며 마을을 하나하나 일궈나갔다.
한동안 산을 넘어 다니다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넜고, 그 배로 자재를 나르면서 토굴을 파고 집을 지었다.
인근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에도 첫발을 디뎠다.
11월에 밀을 심어 이듬해 7월 수확하고 밀을 수확한 땅에 메밀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방식이었다.
직접 재배한 유기농 밀로 빵을 만들고 술도 빚었다.
나무로 만든 집 '소목화당'은 5년 전부터 지인 권선하 씨와 함께 운영해 온 펜션이다.
맹개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을 위해 펜션과 함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자연을 벗 삼아 느리게 사는 삶을 나누고 있다.
밀밭이 황금 들녘으로 변하는 6월과 메밀꽃이 새하얗게 마을을 뒤덮는 9월에는 농가 음악회도 열린다. 박 대표가 직접 설계해 나무와 비닐로 지은 거대한 돔하우스가 음악회 무대가 된다.
아쉽게도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음악회를 열지 못했다고 한다.
10년 전부터 시험 삼아 해 온 술 빚기에도 최근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인근 예끼마을에 양조장 '맹개술도가'를 차렸다. 쌀은 한 톨도 넣지 않고 직접 재배한 통밀만으로 증류식 소주를 만들고 있다.
조선 초 안동의 선비 김유가 집필한 요리서 '수운잡방'에서 찾은 제조법을 참고해 만든 술이다.
맹개마을이 낙동강 옆이라 허가가 나지 않아 인근 마을에 양조장을 냈지만, 숙성은 맹개마을에서 이뤄진다.
박 대표가 직접 언덕을 파서 만든 토굴이 자연 숙성고 역할을 한다.
문을 열고 토굴 안으로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토굴 안은 1년 내내 12∼17도의 기온을 유지한다고 한다.
항아리뿐 아니라 오크통 안에서도 소주가 익어가고 있었다. 위스키처럼 오크통에서 18년 숙성시킨 소주를 내놓는 게 박 대표의 목표라고 한다.
천천히 숙성해 오랜 기다림 끝에 맛볼 수 있는 술. 자연에 순응하며 느리게 살아가는 맹개마을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 "약간의 불편과 느림을 감수하면 자연이 주는 행복을 누릴 수 있어요"
맹개마을은 이곳을 찾는 여행객을 위해 다양한 즐길 거리를 준비해놨다.
박 대표가 직접 수확한 유기농 밀로 천연 발효 빵을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밀로 만든 술을 직접 증류한 뒤 용기에 담아갈 수도 있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에서 카약이나 낚시를 즐겨도 좋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홍파주막으로 등장한 초가집에 배를 깔고 누워 책과 함께 뒹굴거나 학소대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강가에 앉아 그저 멍하니 자연을 바라만 보는 것. 이것이 이곳을 누리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아름다운 학소대 절벽, 내리쬐는 햇살에 반짝이는 낙동강의 은빛 물결, 푸른 메밀밭 위를 한가로이 뛰노는 거위들, 청아한 강물 소리와 어우러져 들려오는 온갖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이다.
오지 마을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서쪽 산 너머로 해가 기울면 이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다. 캄캄한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과 반짝이는 반딧불이는 맹개마을의 밤이 선사하는 선물이다.
오늘 밤 이곳에 묵어가는 여행객은 우리 일행뿐. 소목화당에 옹기종기 모여 못다 한 담소를 나누며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이른 아침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한 거위들이 벌써 일어나 뒤뚱뒤뚱 풀밭을 산책하고 있다. 안개가 옅게 깔린 아침 공기가 사뭇 상쾌하다.
거위들을 따라 정원을 거닐다 뒷산 전망대에 올랐다. 어제 건넌 낙동강 줄기와 강 너머 농암종택이 저 아래 아스라이 보인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밀밭 너머로 학소대를 병풍처럼 두른 소목화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화로운 풍경을 마음속에 꼭꼭 눌러 담고 내려와 다시 배에 몸을 싣고 강을 건넜다. 어느새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땅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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