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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만석거, 축만제
정조시대 원래 이름 되찾아
2020-03-25 12:50:35최종 업데이트 : 2020-03-26 10:52:44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만석거 전경, 정조대왕이 명명한 이름을 되찾았다.

만석거 전경, 정조대왕이 명명한 이름을 되찾았다.


최근에 일왕저수지는 만석거, 서호는 축만제라는 정조시대의 이름을 되찾았다는 국토지리정보원 고시를 봤다. 상당히 늦었지만 환영할만한 일이다. 특히 '일왕저수지'라는 명칭은 일제에 의해 명명된 것인데 나라는 독립을 했지만 지명은 독립하지 못했다. 일제에 의해 빼앗겼던 지명을 찾는데 무려 80여 년이나 걸렸다. 지명에 대한 무관심, 역사적 지식의 부족과 정체성의 결여가 빚은 촌극이 아닐 수 없다.

기자는 몇 년 전부터 '일왕(日旺)저수지'를 '만석거(萬石渠)'라는 원래 이름으로 불러야한다고 e수원뉴스에도 몇 차례 글을 썼고, 타 매체에도 기고했다. '일왕저수지'란 명칭에는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폄하하는 일제의 간교한 음모가 들어가 있음을 지적했고 만석거 주변의 지명에 들어가 있는 '일왕'이란 명칭도 변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글의 논지는 일제가 왜곡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명이 일제에 의해 통폐합되는 과정에 음모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수원화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라 불렀는데 원래 이름인 축만제를 되찾았다.

수원화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라 불렀는데 원래 이름인 축만제를 되찾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대부분의 인터넷과 인터넷 지도, 네비게이션 등에서는 일왕저수지를 버리고 만석거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지만 관공서의 공식적인 기록에만 식민의 때를 벗지 못했다. 심지어는 일왕저수지를 두둔하는 무식하고 몰상식한 사람도 있었다. 공식적인 기록이 이렇다보니 인터넷 블로그, 카페 등의 글에는 '일왕저수지'라는 표현을 의미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다.

수원시 향토유적 제14호 만석거는 1931년에 일제에 의해 원래 이름을 잃어 버렸다. 왜 원래 이름인 만석거가 일왕저수지로 바뀌었는지 17세기, 18세기, 19세기 기록인 '수원부읍지', '화성지', '수원군읍지', '수원부지도', '광주부읍지', '광주부지도' 등과 일제강점기 기록, 수원시사 기록에서 원인을 찾아보았다.

1639년 편찬한 광주부읍지에 있는 광주부 지도, 고궁박물관 소장

1639년 편찬한 광주부읍지에 있는 광주부 지도, 고궁박물관 소장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광주부읍지는 1639년에 편찬했는데 수원부와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던 광주부 지명으로 의곡면(義谷面), 왕륜면(王倫面), 일용면(一用面), 송동면(松洞面)이 있다. 한자 표기를 주목해서 봐야한다. 1789년에 광주부의 일용면과 송동면이 수원부에 속하게 된다. 이후 19세기의 기록에는 의(義)자가 의(儀)자로, 왕(王)자가 왕(旺)자로 바뀌거나 혼용해서 사용했다.

1871년 편찬한 광주부읍지에 있는 광주부 지도, 규장각 소장

1871년 편찬한 광주부읍지에 있는 광주부 지도, 규장각 소장

 
수원부가 신읍치인 팔달산 아래로 이전할 무렵 수원부의 북쪽 끝은 공석면(空石面) 이었는데 이후의 기록을 보면 수원화성 북쪽으로는 일용면(日用面), 형석면(荊石面), 송동면(松洞面)만 보인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지명이 바뀐다.

1914년 광주군의 의곡면(儀谷面), 왕륜면(旺倫面)이 수원군에 통합된다. 이후 일용면(日用面)과 형석면(荊石面)은 일형면(日荊面)으로, 의곡면(儀谷面)과 왕륜면(旺倫面)은 의왕면(儀旺面)으로 통합된다. 1931년 일형면(日荊面)과 의왕면(儀旺面)이 일왕면(日旺面)으로 통합된다. 이런 과정에는 일(一)자가 일(日)자로, 왕(王)자가 왕(旺)자로, 의(義)자가 의(儀)자로 변형되거나 혼용해서 쓴 것으로 보인다. 우연의 일치로 일왕이란 지명이 나왔다고 볼 수는 없다. 만석거가 일왕면에 있다고 해서 '일왕저수지'로 둔갑된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1831년 경 편찬한 화성지에 있는 수원부 지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831년 경 편찬한 화성지에 있는 수원부 지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축만제는 수원화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로 부르지만 만석거가 수원화성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호로 부르지는 않았다. 19세기에도 만석거를 북지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팔달문을 남문이라 부른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1872년 간행된 수원부 지도, 규장각 소장

1872년 간행된 수원부 지도, 규장각 소장

 
만석거는 1795년에, 축만제는 1799년에 축조되었다. 대유둔과 서둔이란 국영농장을 설치해 안정된 농업경영을 할 수 있었다. 둔전의 성공으로 수원의 백성들은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원화성을 유지하는 비용도 충당할 수 있었다. 정조시대 농업혁명과 개혁정책의 산실이었다.

만석거와 축만제의 가치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축만제는 2016년, 만석거는 2017년에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원래 이름을 되찾았으니 앞으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를 바란다.

만석거, 축만제, 정조시대 원래 이름,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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