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기록이 '역사'…수원 최초 엘리베이터 건물, '상공회의소'
부국원에서 열린, '기록과 축적의 가치에 대한 공동 연수'
2019-11-26 07:31:39최종 업데이트 : 2019-11-26 07:37:33 작성자 : 시민기자 강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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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구 향교로에 있는 부국원.(사진 정면) 일제 강점기 종묘 회사였던 부국원은 이후 관공서, 의원, 인쇄소 등으로 쓰였다. 지금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인문 문화 프로그램이 열리고 있다. 지난 22일와 23일, 부국원 3층에서는 마을의 기록과 축적의 의미를 새겨보는 공동연수가 이틀에 걸쳐 열렸다. 수원미디어 센터는 넘쳐나는 디지털 미디어의 세상에서 기록의 가치를 되새겨보고, 시민 개개인들이 소장하거나 남겨놓은 기록들을 축적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이번 워크숍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부국원 3층에서 열린 수원 미디어 아카이브 워크숍. 뒤에 팔짱 낀 경인일보 조형기 기자는 '사진으로 본 수원의 어제와 오늘'을 강의했다. 1905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수원 팔달문 사진. 프랑스에서 사진 엽서 형태로 제작되었다. 사진에 '서울-남문-제물포로 가는 길' 이라고 불어로 적혀 있다.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며 잘 알려진 독일인 장교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 1868~1945. 당시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가 찍은 사진들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으로 남아 있는 독일인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씨의 기록들처럼, 일제강점기부터 6.25까지의 사진들은 주로 외국인들에 의해 남겨진 것이었다. 부국원 3층에 놓인 1981년대 지금의 향교로 사진. 뒤편으로 부국원 건물이 보인다. 수원과 여주를 잇던 수여선(수려선) 안의 승객들. 수려선은 1930년대에 만들어져 1972년 폐쇄되었다. 6.25 전후로는 미군들이 남긴 사진들이 많았지만, 이후에는 수원 사람이 찍은 사진도 남아 있었다. 보구산부인과를 운영했던 김동휘 박사와 사진 공예사로 알려진 홍의선 씨는 1956년 수원 사우회를 결성해 서호에서 사진 촬영대회를 열 정도였다. 당시 카메라는 지금의 고급자동차처럼 부의 상징이었다. 제대로된 보도사진이 나온 것도 1960년대가 지나서였다.
"지금와서 생각되는 거지만, 제가 기관에서 내는 보도자료만 썼다면 아마 여기 없을 것입니다. 문화 역사적 맥락을 잃은 기사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려져야 합니다." 구술의 기록의 중요성을 강의하는 김형아 강사 이어진 강의는 행궁동에서 구술사를 기록하는 김형아 연구원이었다. 구술사는 쉽게 말해 우리 주변을 들여다 보는 일상 아카이브(Archive)였다. "동네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어요. 신의주가 고향이시래요. 신의주가 그렇게 멋진 도시였데요. 그러다 하얼빈으로 이사가셨다는 거예요. 제가 거기서 느꼈어요. 아, 나는 남한이라는 섬에서 살고 있었구나!"
우리 역사는 실증주의 영향을 받아 확인된 사실만 역사로 인정받고, 확인되지 않은 구술들은 역사로 남지 못했다. 할머니의 삶은 사실 확인을 할 순 없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라고 긴 머리의 연구원이 말했다. 수원의 극장에서 그림을 그렸던 이윤엽씨와 영사기사 이상만씨 김형아 씨는 극장 간판에 그림 그려주시는 분을 만나기 위해 계속 물어물어 찾아갔던 경험을 들려줬다. 그래서 똑똑함보다 끈기가 필요하다고 하며 구술 기록을 하며 깨달은 것들을 전했다.
"지금은 내가 잘해서 번다고 생각들 하잖아요. 그런데 시장에서 일하시는 분의 말씀이 내가 먹을 건 다른 사람이 가져다 주는 것이랍니다. 돈은 사람 관계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란 말씀이셨죠."
행궁동 구술사 김형아 씨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구술사 축제를 열며 책을 발간했다. 부국원과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에도 민중자서전과 민중생활사를 담아낸 책들이 꽂혀 있었다. 부국원에서는 수원에 있었던 극장들과 벽돌공장 영신연와의 기록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가치를 알고 찾는 사람들은 아직 드물었다. 수원미디어센터, 마을, 기록, 수원, 근현대, 사진, 영상, 부국원, 아카이브, 워크숍, 극장, 김형아, 조형기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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