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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장승을 세우라 명했다
한글 정리의궤에서 찾은 장승
2020-05-20 10:14:43최종 업데이트 : 2020-05-20 10:14:37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1906년 9월 헤르만산더가 함경도 성진에서 길주로 가는 길에 만난 장승, 길가의 장승에는 길주(吉州)라는 명문이 보인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06년 9월 헤르만산더가 함경도 성진에서 길주로 가는 길에 만난 장승, 길가의 장승에는 길주(吉州)라는 명문이 보인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정조대왕은 1789년 10월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옮기고 이후 1800년까지 12차례 수원을 방문했다. 왕의 행차를 행행(行幸)이라고 하는데,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 방문해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회갑잔치를 연 것이 가장 유명한 행차이다. 이때 있었던 왕의행렬, 회갑잔치, 군사훈련 등이 현재 수원화성문화제에서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재현되고 있다.
 

수원의 첫 경계인 지지대고개부터 현륭원까지 왕의 행차로인 필로(蹕路)에는 5리(里, 1리는 약 422.03m)마다 장승을 세웠고 각 경계나 갈림길마다 그곳 지명을 새긴 표석을 세웠다. 화성성역의궤, 화성지에는 표석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지지현부터 만년제까지 20개의 표석 명칭이 나온다. 화성지에는 장승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지지현부터 능원소동구까지 11곳에 장승을 세웠다. 표석만 세운데도 있고 장승만 세운데도 있고 표석과 장승을 함께 세운 곳도 있었다. 현재 장승은 모두 사라졌고 표석은 괴목정교, 상류천, 하류천, 안녕리, 만년제 등 5개만 남아있다.


1907년 헤르만산더가 찍은 법수, 마을 어귀 서낭당과 법수, 법수는 쌍으로 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07년 헤르만산더가 찍은 법수, 마을 어귀 서낭당과 법수, 법수는 쌍으로 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수원박물관 입구에 서낭당과 장승을 재현해 놓았다. 이것은 장승이 아니라 법수이다.

수원박물관 입구에 서낭당과 장승을 재현해 놓았다. 이것은 장승이 아니라 법수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장승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태종 14년(1414)의 기록을 보면 도로의 식수(息數)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척(尺)으로 30리(里)를 계산하여 대후(大堠)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10리 단위로는 소후(小堠)를 세웠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1485년)에서는 여기에 그 이수(里數)와 지명(地名)을 새겨 넣도록 하는 한편 대후의 설치와 함께 역(驛)을 두기도 하였다.
 

일성록에는 '도로에는 5리마다 장승을 세워서 노정을 표시하고', '도로의 경계를 정하고 장승을 세우며', '도로를 측량하고 장승을 세우며', '동구의 장승을 세운 곳부터 섬암 및 방축로까지의 길을 닦고 눈을 치우는 일은', '15말은 이번에 재실 동구의 장승 뒤 대왕교 동쪽에 심었다' 등 장승을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장승은 오늘날의 교통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했다. 현재 베를린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장승에서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自仁川官門十里 地名星峴 西距濟物浦二十里 東北距京城六十里(자인천관문십리 지명성현 서거제물포이십리 동북거경성육십리 – 이곳은 인천의 관문에서 10리에 위치한 성현이고 서쪽으로 20리에 제물포가 있고 동북으로 60리에 경성이 있다.
http://www.smb-digital.de/eMuseumPlus?service=ExternalInterface&module=collection&objectId=147175&viewType=detailView).위 명문을 바탕으로 지지대고개에 있던 장승의 명문을 추정해보면, '이곳은 지지대고개이며 남쪽으로 15리에 화성행궁이 있고 북쪽으로 90리에 한양이 있다'라는 표기가 있었을 것이다.


1925년 로베르트 베버가 찍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영화에 나오는 법수. [사진, 유튜브 영상 캡처]

1925년 로베르트 베버가 찍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영화에 나오는 법수. [사진, 유튜브 영상 캡처]
광교산 입구에 있는 법수, 앞으로 법수를 장승이라고 부르지 말자.

광교산 입구에 있는 법수, 앞으로 법수를 장승이라고 부르지 말자.

 

한글 정리의궤 권34 정사 봄 원행(1797년 1월 29일부터 2월 1일) 편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1797년 1월 30일 화성행궁에서 현륭원을 방문하던 정조대왕은 안녕리에 이르러 행 우승지 이익운에게 하교하기를 "안녕리(安寧里)의 이름은 근래 이 마을을 통칭하니, 장승을 안녕리로 쓰도록 화성유수에게 이르라" 하셨다.
 

오랜 기간 장승에 대한 기록을 추적한 끝에 마침내 왕명으로 장승에 지명을 새기라는 기록을 찾은 것이다.  1831년 편찬한 화성지(華城志)에 안녕리에 표석과 장승을 세웠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안녕리 장승에는 '이곳은 안녕리이고 남쪽으로 5리에 능원소동구가 있고 북쪽으로 5리에 유첨현이 있다'라는 명문이 있었을 것이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장승, 장승은 이정표로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장승, 장승은 이정표로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조대왕 당시 수원은 장승의 땅이었다. 지지대고개부터 능원소동구까지 11개의 장승이 있었고 20개의 표석이 있었다. 박동진 명창이 불렀던 판소리 변강쇠타령에는 지지대 장승이 경상도 72관, 전라도 56관을 총괄하는 조선의 장승 중 노들강변 선창목의 대방장승 다음으로 서열 2위였다고 노래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화성전도 6폭 병풍은 1800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지대고개에 지지대 장승을 그렸다.
 

장승(長栍, 長丞)이란 길가에 세워져 현재의 지명, 이웃 마을의 지명과 거리와 방향을 표시한 순수한 이정표였고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란 명문으로 마을 입구 등에 서있던 것은 장승이 아닌 법수(法首)나, 장신(將神)으로 불리며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1884년 우편제도가 도입되고 1895년 역참제도가 폐지되면서 이 땅에서 장승이 자연스럽게 소멸되어간 것이다. 문화적 열등의식을 가진 일제가 우리의 정신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법수나 장신을 장승으로 왜곡한 것을 우리가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다. 천하대장군을 보면 자연스럽게 장승이라 부르고 있으니 일제의 간교함은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의 정신을 옥죄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1800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화성전도 6폭 병풍속 지지대고개에 그려진 '지지대 장승'.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800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화성전도 6폭 병풍속 지지대고개에 그려진 '지지대 장승'.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정표로서 명문이 새겨진 장승 실물이 존재하고 명문을 새기라는 기록까지 있으니 장승의 본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장승은 단순히 이정표였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 전국의 장승배기에서 일제 만행의 잔재인 정체불명의 '장승제'를 지내는 코미디는 멈춰야한다. 길가의 장승이 웃을 일이다. 장승의 정체성을 찾고 장승을 복원하면 역사 문화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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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장승, 정리의궤, 안녕리, 행행, 현륭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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