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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
내 아이들이 수원사랑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2008-12-26 13:42:21최종 업데이트 : 2008-12-26 13:42:21 작성자 : 시민기자   권오기
#1. 영화속 한 아버지의 이야기

고밀도 스캐너를 한달에 적어도 2개는 팔아야 집세와 아이의 보육료며 생활비가 되기 때문에 하루종일 병원을 전전하며 발품을 팔아야하는 주인공 크리스는 의료기기 영업사원이다. 하지만 파는 달 보다 못파는 달이 훨씬 많은  팍팍하기만한  현실에서 밀려만 가는 집세와 세금...결국, 세탁공장에서 매일 야근을 해야 했던 아내는 가난을 이기지 못해 떠나버리고 5살난 어린 아들과 단둘이 남게 된다.

수원에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_1
수원에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_1

어느날, 금융가를 지나던 크리스는 증권 중개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멋진 페라리의 주인을 보면서 자신도 증권 중개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월스트리트 증권 중개인 인턴쉽 면접을 보기로 한다. 하지만, 이력서에 고등학교 밑의 세칸을 채울 수 없는 학벌과 경력, 그리고 흑인이라는 인종차별의 행태같은 높은 벽이 군건히 존재했지만 굴하지 않고 면접을 보기로 한다!

설사가상으로 면접 전 날, 집에서 페인트 칠을 하던 크리스는 밀린세금 때문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하룻 밤 갇히게 되고 다음 날 전재산 모두를 털어주고 면접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풀려나 온 크리스, 페인트 자국과 먼지로 뒤집어 쓴 작업복을 갈아입을 시간은 고사하고 버스비가 없어 죽을 힘을다해  달려 면접장에 겨우 도착하지만 청소부 차림의 크리스를 본 면접관들은 황당하기만 하고 그 중 한명이 크리스에게 묻는다.
"자네라면 인터뷰에 셔츠도 안 입고 온 녀석한테 뭐라고 할건가? 그리고 내가 그를 고용한다면 자네는 뭐라고 할건가."
 
그 어려운 인턴쉽 면접은 합격했지만 6개월간의 인터쉽 과정은 무보수 였던 것, 그리고 60명 중에 단 1명만이 정직원이 되는 현실 속에서 남아 있는 고밀도 스캐너를 팔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크리스, 영화 내내 크리스는 관객까지 숨이 차도록 새 없이 뛰고 또 뛴다.
"다른 이들은 7시까지의 시간이 있었지만, 나에겐 아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9시간 동안 하는 일을 나는 6시간 동안에 마쳐야 했다. 나는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통화 사이에 전화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하루 8분을 벌 수 있었다. 또 물을 마시지 않아서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줄였다."
 
스캐너를 팔지 못한 날들은 하룻밤 잠자리도 구할 수 없는 막막한 부자, 고단함에 지쳐 버스에서 쓰러져 자기도 하고, 순환행 지하철이 이들에게 하룻밤 잠자리가 되기도 한다. 최악의 날은 중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휴지를 바닥에 깔고어린 아들을 재워야 하는 크리스, 자기 화장실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든 아들이 깰까 아이의 귀를 두손으로 감싸 막고 절망감과 두려움에 떨며 우는 크리스, 버스 차창밖을 통해 보이는 이쁜 집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아들.
 
운 좋게 들어간 부랑자 수용소에서 아들을 씻기다 불이 꺼지고, 전기도 끊겨버린 어두운 공간에서 조그만 창틀에서 삐져나오는 한줄기 빛에 의지해 인턴쉽 마지막 과정인 시험 공부를 밤새워 한다. 피곤에 치칠대로 치친  몸으로, 식사 중에도 틈만 나면 시험 공부를 했고,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 혈매까지도 서슴치 않는 크리스.

끼니와 하룻밤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교회에서 "신이여 내 앞에 가로 막힌 저 산을 부디 치우지 마시옵고 산을 돌아서 갈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라는 찬송가를 함께 부르며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진정한 위안을 받고 있는 크리스.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사랑하는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달리고 또 달린다.

6개월 후 인턴쉽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날, " 오늘은 멋진 셔츠를 입었군 내일도 그 옷차림으로 출근하게나. 정직원이 되었다는 뜻이네" 복받쳐 오르는 감격으로 벌겋게 충열된 눈에 가득 고이던 눈물, 그 표정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 당당하게 승리하고, 치열하게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한 스스로에게 아낌 없이 박수를 보내며 그는 이렇게 축하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잘 했어 크리스 넌 해낼 줄 알았어!" "내 인생의 이 부분의 제목은 이 짧은 순간의 제목은 바로 '행복' 이다." 합격의 기쁨을 가장 먼저 아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가 행복을 함께 나누는 아들과 아빠. 유치장ㆍ버스정류장ㆍ지하철 화장실 등을 오고가며 밤을 새울 때도, 고객을 찾아 정신없이 발품을 팔 때도 결코 아들의 손과 희망을 놓지 않았던 한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를 보면서, 하루 종일 밖에서 힘들게 일을 하고 와서도 가족들 앞에서는 힘든 내색하나 하지 않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여서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 영화의 크리스 처럼 살고 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냉정하게 돌이켜 보면 모두 주인공 겪는 그 고통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은 왜 그럴까? 뭔가를 열심히 노력한 뒤에 대가를 얻었을 때 그리고 힘든 일을 떨쳐버렸던 순간에 작은 기쁨을 느꼈는데 그 기뻤던 순간들이 스쳐지나 가는 것이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였을까?
행복은 영국의 계관시인 워드워즈가 말한 무지개 일까?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나의 가슴은 생의 환희로 가득 차나니,
내가 어릴 적에도 이와 똑같았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고, 늙어서도 그럴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노라!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나니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나니.
원컨대 내 생애의 나날이
자연을 숭앙하는 어릴 적 마음으로 이어져 갔으면 하노라!


#2. 수원 사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

수원사랑 장학재단은 지난 12월20일,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의 자부심과 사기앙양을 위해 '장학생의 날을 선정하여 시청 대강당에서 1.2.3차 장학생들을 초청,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했다. 
장학생 상호간의 정보교환, 친목도모 등을 도모하고, 이를 계기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도록 대화의 광장을 만든 것이었다. 

이 자리에 내 아들 두놈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수원시장님을 비롯한 내,외빈과 함께 기념사진도 촬영하였다.  

수원에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_4
수원에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_4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나의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경상도 청송 보호감호소 자리가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던 곳이었다. 
35년전, 중학생이였던 나는 중앙선 기차에 몸을 실고 죽령을 넘어서 서울에 왔다. 중고등학교 시절, 서울에 와서 부모님의 기대만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재수를 해서 대학교에 들어갔어도 정신 못차리고 방황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취직시험에 낙방하고 시골에 내려갔을땐 나자신이 초라했고, 또한 자존심이 나를 가만히 놓아 두질 않았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정말 결사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 당시 최고의 기업이라고 할수 있는 현대그룹에 공채로 합격하게 되었다. 나에게 합격통지서가 날아 들었고, 모교의 교수님들 그리고 선후배들로 부터 축하를 많이 받았다.  

현대에 입사하여 기술직이 아니라 관리직이여서 항상 불안했다. 세상은 평등하다고 하는데 내가 접한 사회는 평등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머리가 히끗히끗해지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면서 세상의 중심이 나에게서 아들놈으로 옮겨갔다. 
큰애가 초등학교 때, 광화문 뒷골목에서 가족끼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이대 정의숙  전총장님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분이 우리 애들을 불러놓고 "애들 골상이 좋으니 잘 키워 보라"고 덕담을 해 주셨다. 총장님의 그 한마디 덕담은 젊은 부부인 우리에겐 큰힘이 되었다.

그로부터 큰놈은 승승장구를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전교1등은 물론 성적에서도 모두 1등급을 차지하였고, 경기도, 수원시, 동창회 등 모든 장학금을 휩쓸게 되었고, 그 여세로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 빅3대학에 동시 합격하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큰아들놈의 모교에서는 아들놈의 대학 합격중, 성적표, 장학증서 등을 타임캡슐속에 넣어 교정에 보관하고 있다. 우수성이나 정밀도 측면에서 보면 다소 뒤쳐지지만, 황소처럼 밀고 나가는 저력이 있어 보이는 작은 아들놈은 형의 성과를 사정권 범위안에 놓고 추격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제 내년 고3, 뜨거운 여름날이 지나면 그놈 역시 포항, 대전, 관악산을 넘는 행군을 하게 될것이다.

수원에 10여년 전에 왔다. 집사람은 "수원은 교육여건이 나쁘니 서울 가자"고 많이 다투기도 했다. 새로운 집에 살아 보고 싶어서 아파트를 분양받았더니 비행기 소리가 많이 난다고 집값이 오르지 않아 상대적 박탈감에 쌓이기도 했다. 
수원에 살면서 외환위기가 와서 실직을 당하고, 사기를 당하고, 카드를 막기 위해 일용직도 근무하고, 생활고에 시달리어 이혼 위기를 겪는 등 40대에 겪을 수 있는 모든 일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불과 10여분이면 갈수 있는 서호, 일월, 일왕저수지에 가서 호수를 보면서 마음을 비우기도 했었고, 정말 심적고통이 감내하기 어려울때는 제부도 바닷가에 가서 "내 인생 돌려달라"고 외쳤다. 
이처럼 어려울때 수원시에서, 애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 및 수상소식은 우리가족 서로에게 천군만마의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수원에서 서울로 가다보면 과천을 경유하게 된다. 부자동네여서 그런지 풍부한 녹지와 관악산과 청계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이 가슴에 금방 와 닿는다. 또한 제일 부러웠던 것이 과천도서관이였다. 
수원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여서 평소엔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정말 묘하게도 그 아름다움을 아주대 병원 병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주대 캠퍼스와 광교산의 아름다운 단풍, 군데군데 있는 아름다운 호수, 끝없이 펼쳐져 있는 녹지, 노송에 품은 자랑스런 문화유산 화성 등이 한폭의 병풍이 되었다. 또한, 불과 10여분 거리에 학교, 도서관, 공원, 호수, 교통, 병원 등 내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200여년전 신도시에서 노송의 굿굿한 기상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좋다.    

수원에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 
무지개는 가까이 있었고,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어려운 순간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고3이 되는 작은 아들은 '사춘기의 황소병'을 가끔 앓는다. 그때마다 제대로 지원해 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아쉽기만 하지만 아들에게 얘기한다. 
나폴레옹이 알프스산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침공할때 "병사들이여, 저 고개를 넘으면 금발의 오스트리아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작은 아들에게 "아들아! 저 관악산을 넘으면 예쁜 서울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고, 거기에 또한 너의 형이 있다" 
서울에 살든, 수원에 살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수원에 사는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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