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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 레이건과 대처의 리더쉽
2008-12-19 20:18:05최종 업데이트 : 2008-12-19 20:18:05 작성자 : 시민기자   권오기

타산지석, 레이건과 대처의 리더쉽_1
타산지석, 레이건과 대처의 리더쉽_1

레이건 전 대통령( "미국민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은 대통령")이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향년 93세에 운명을 달리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에선 애도의 물결이 넘쳐났고, 백악관을 비롯한 관공서엔 일제히 조기(弔旗)가 게양됐다. CNN등 방송사들은 레이건 추모 특집방송을 잇따라 내보었다. 

뉴욕타임즈는 레이건 사망기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영웅에 목말라했던 시기.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워터게이트 추문과 이란 인질사건으로 국가적 자존심이 추락했던 때, 레이건은 미국의 위대함을 다시한번 상기시켰다. 미국이 다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엇갈리지만, 역대 미국 대통령중에 최고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했지만, 가장 젊게 산 낙천주의자 레이건. 그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는 미국인들 사이에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 등을 "악의 축" 이라고 불러, 파문을 일으켰지만 80년대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처음 부른 것은 레이건이었다.

'87년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는 고르바쵸프당시 소련 대통령을 직접 거명, "여기에 와서 이벽을 허물라"고 외쳤다. 레이건과 콤비가 되어 공산권을 붕괴시킨 여걸, 마가랫 대처 전 영국 수상의 회고록을 읽으면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소련붕괴 전략이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대처는 공산권 붕괴의 공을 레이건에게 전적으로 돌리고 있다. 대처는 또 소련제국이 큰 유혈사태 없이 해체된 데는 고르바초프라는 마음씨 좋은 러시아 사나이의 등장과 개혁 시도가 결정적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면서 러시아에서는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그를 변호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대처 수상에게 솔직하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SDI 계획을 밀고나간다면 소련의 경제에 큰 압박을 가하게 될 것이다. 소련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결국 소련은 미국의 도전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즉 군비경쟁을 포기할 것이다. 

이는 미국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우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개혁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對美우위의 군사력만이 소련 지도부로 하여금 개혁을 거부하도록 하는 마지막 보루이니까. 

레이건은 SDI를 추진할 때부터 대처 수상에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배우시절 좌익과 대결하면서 공산주의의 악마적 속성을 체험했던 레이건의 이 무서운 일관성이 소련군사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개혁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했으며 그 길은 공산권 해체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힘을 바탕으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로부터는 어떤 양보도 얻을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강한 압박을 받아야 변한다. 

레이건은 분석적이지 못했으며 전략적인 사고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 어떻게 힘과 권력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아는 지도자였다. 레이건은 결단이 필요할 때 흔들리지 않았다. 레이건 집권 초기인 81년 당시 연방정부에 소속돼 있던 항공기 통제사들이 파업을 일으켰다.통제사들은 모든 항공기를 세워버리겠다고 정부를 위협했다.당시 항공기 통제사들의 파업은 불법이었다.

레이건은 단호했다. 파업에 참여한 만여명의 통제사들을 즉각 해고해버렸다. 결과적으로 통제사들의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만여명의 통제사들은 단 한명도 직장에 복귀하지 못했다. 이들중의 많은 이들은 다시는 통제사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레이건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일화다.

경제적으로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라고 불리우는 공급중시 경제정책으로 미국 경제회생의 기틀을 마련한 대통령으로 평가된다.그의 경제정책은 4가지로 압축된다. 감세, 저인플레, 정부지출 축소, 규제완화 등이다.부시 행정부의 감세정책도 레이건 행정부시절의 감세정책을 골간으로 하고 있다.

그의 재임기간중 미국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8년 재임기간중 7년간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에 시달렸고, 그의 경제정책은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으며, 개인소득세 최고율은 70%에서 28%로 낮아졌으며,기업법인세는 48%에서 34%로 떨어졌다.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규모 자체는 커졌지만, 정부지출의 연평균 증가율은 카터 행정부때의 4%에 비해 훨씬 낮아진 2.5%를 기록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금융산업을 비롯해 장거리전화사업, 정유산업,천연가스,운송업 등의 규제가 크게 완화된 것도 그의 치적으로 꼽힌다. 인플레이션은 10.4%에서 4.2%로, 실업률은 7.0%에서 4.5%로 떨어졌다. 그러나 레이건 집권기간 동안 마련된 경제정책의 틀은 이후 미국 경제가 최장기간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경제대통령으로 꼽히는 앨런 그린스펀 현FRB의장을 처음 지명한 것도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위대한 전달자(Great communicator)로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직관적인 감각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갔다. 배우 출신이어서 알아듣기 쉬운 말로 국민들을 설득시키는 힘은 탁월했다. 영국의 BBC방송은 레이건의 이런 능력을 가르켜 "단순함이라는 자신의 최대약점을 장점으로 변화시킨 힘"이라고 평했다. 백악관 집무실에 방송 카메라를 불러들여 국민들과 의사소통했고, 지금은 정례화된 대통령의 라디오 주례방송을 처음 만든 이도 레이건이었다.

레이건 전대통령은 즉석 연설같은 순발력에선 뛰어났지만 국정의 현안을 파악하는 능력은 다소 모자랐다. 특히 경제문제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었다. 기자들이 경제문제를 질문하면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헬기앞 브리핑"이다. 백악관 뒷뜰에 헬기를 준비시켜놓고 간단한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현안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헬기로 이동한다.

대통령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면 즉석에서 답하지만 다소 이해가 안되는 질문이 나온다거나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귀에다 손을 대고 "뭐라고?"하는 표정을 짓는다. 마치 헬기 프로펠러 소리때문에 질문이 잘 안들린다는 듯이..국민들에게 비쳐지는 대통령의 모습은 "헬기를 타기위해 걸어가는 몇십초 동안조차도 낭비하지 않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이다. 

한편 '철의 여인' 대처 총리는 개인에게 자유를 주는 만큼 철저히 책임을 물었고, 엄격한 도덕과 질서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당시 좌파의 물결과 영국 현대사에 최악의 계급 갈등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대처의 재임기간중 실업률이 3배로 치솟았으며 가난한 흑인 거주 지역에서는 인종폭동도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폭동 통제 방법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하였고, 노동조합의 폭동이 법질서의 테두리를 넘자 기마 경찰대를 보내어 진압을 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중에서 데모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고 전국 노조대표들이 대처 수상을 항의 방문하자.. 대처는 이렇게 답하였다.
"잘못했군요.. 다음에는 그런일이 있으면 기마대가 아니라 탱크를 보내겠습니다..노조든 누구든 법질서를 어기는 것을 방치한다면 민주주의는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보수당의 당수가 된 뒤 4년 만에 수상에 당선된 대처는 드디어 영국병 치료에 메스를 든다. 영국병이란 당시 높은 인플레, 바닥을 맴도는 경제성장률, 잇단 노조파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해 대영제국 멸망론까지 나올 정도였던 영국의 말기적 현상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신문이 최초로 영국병이라고 사용하면서 유행한 말이다. 수상재임 11년간 이룩한 대처의 대표적 개혁정책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노동운동의 개혁이다. 당시 석탄노조는 영국 노동운동을 선도하는 대표적 강성노조였는데 대처는 이 거대한 공룡을 굴복시켜 그동안 노사 대결주의를 슬로건으로 하던 영국노조에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다. 파업의 나라 영국을 비즈니스의 나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둘째, 국영기업의 민영화다. 근면과 노력을 중시했던 자유주의자 대처는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인 국유화야 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수송, 에너지, 통신, 철강, 조선 등 당시 영국 산업의 중심을 이루는 국영산업은 생산성이 떨어져 영국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고 대처는 이런 국영기업들을 가차없이 민영화시켰다. 

셋째, 공영주택의 민영화다. 당시 50만호에 달했던 영국의 공영주택을 개인에게 매각처리하여 100만명에게 내집 마련의 꿈을 이뤄준 것이다. 공영주택의 불하는 노동자계급의 자조적 노력을 촉발시키고 보수화시켜 보수당 지지계층을 증가시키기도 했는데 이런 정책의 저변에는 시장경제에 대한 그녀의 확실한 가치지향이 깔려있었다. 

넷째,  소득세의 감면정책이다. 과거 집권 노동당의 정책은 중,고소득 계층에서 돈을 거두어 저소득층에게 재배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가진 자들에 근로의욕을 빼앗고, 저소득층에게는 지나치게 국가에 의존하려는 습성을 갖게 하는 등 영국병의 근원이 되었다. 소득세와 법인세의 대폭적인 감면정책은 비대해진 국가재정을 축소하는데도 목적이 있었지만 Do it yourself라는, 즉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그만큼 소득을 늘려가도록 하는 대처의 기본철학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다섯째, 교육개혁이다. 대처는 영국의 경제상황이 나빠진 배후에는 교육과 훈련제도의 결함이 있다고 믿었다. 개혁의 초점은 교육과 훈련의 영역을 각 세대에 확대함으로써 국민 모두에게 비즈니스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소년훈련계획, 학교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능 및 직업교육, 실업자와 기업주, 고용주 등에 대한 전문적 기능을 높이기 위한 성인 사회교육을 시행했다. 대처의 교육개혁 스타일은 과거의 폐해를 단호히 잘라내고 과감히 전진하는 것이었다.

대처 총리는 퇴임 후에 쓴 회고록에서 "폭동은 경찰이 정부로부터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뒷받침을 완벽하게 받아야 진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정치인들이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고 했다. 영국 정부는 경찰이 폭동진압에서 취할 수 있는 법적 행동을 명백히 천명했다. 특히 파업거부 광부들을 위협하는 탄광노조측의 기동시위대에 대해선 집결하기 전에도 경찰이 사전에 해산시킬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또한, 대처는 아마도 가장 많은 名言(명언)을 남긴 정치인중 한 사람으로 꼽힐 것이다. 대처는 1987년 9월 23일 <우먼즈 오운>(Woman's Own)이란 잡지와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잘못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주어야 한다' '내게 문제가 있지만 정부를 찾아가면 경제적 지원을 해줄 것이다' '나는 집이 없다. 정부가 집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식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에 전가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회가 누구예요? 사회? 그런 건 없습니다! 개인으로서의 남자와 여자가 있고, 가족들이 있는 것뿐입니다. 정부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스스로를 도와야 합니다. 스스로를 돕고 이웃을 돕는 것은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삶이란 것은 주고 받는 거예요. 주는 것 없이 받을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사회? 그런 건 없습니다!"라는 말이 유명해졌다. 한국의 자칭 진보적 인사들은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돌린다. 30명을 연쇄살인한 범인의 책임도 사회의 냉대에 있다고 한다. 북한의 배고픔과 살육도 김정일이 아니라 국제사회에 있다고 한다. '사회'라는 개념을 만들어 모든 책임을 거기에 떠넘기곤 "우리는 결백하다"고 홀가분해하는 꼴이다. 이런 위선적 태도에 대해서 대처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것이다.

1999년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마거릿 대처를 '20세기의 20대 정치인' 가운데 한 명으로 뽑았다. '대처리즘'이란 말을 남길 정도로 대처의 정치적 유산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큰 영향력과 상상력을 행사하고 있다. 법치주의, 작은 정부, 시장경제, 민간의 자율과 책임을 강조한 대처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은 한국에서도 유력한 모델로 연구되고 있다.

레이건, 대처, 요한 바오로 2세, 바웬사는 1980년대에 서로 협력하여 공산권을 무너뜨린 거인들이다. 탄광노조든, 소련이든 '파쇼 좌익'에 대해선 힘만이 먹힌다는 대처의 경험적 관찰은, 개혁저항세력화한 자칭 진보세력의 도전을 극복해가면서 햇볕정책을 대체할 새로운 대북정책을 모색해야 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하는 충고처럼 들린다. 좌익이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대처의 정책과 전략을 뒷받침했다. 

핵무장한 북한정권을 상대함에 있어선 레이건 미국 대통령, 국내의 좌파적 개혁저항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는 대처를 연구해야 할 시점이 왔다. 촛불시위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노출된 이명박 대통령의 약점들 홍보부족, 연설의 문제, 법질서 수호 실패, 신념의 부재 등은 거의 전부가 대처 연구에 의하여 치료될 수 있는 항목들이다.

특히 개혁저항세력화한 좌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대처에 있다.  대처는 소련전문가들이 소련의 지도부를 강·온파로 분류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지적했다. 전체주의 체제 안에서는 의미 있는 정책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때 한국의 북한 전문가들도 북한 권력층 내부를 강·온파로 나누고 김정일을 개혁온건파, 군부를 반개혁 강경파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황장엽 씨는 "북한에서는 김정일만 결정권을 갖고 있는데 무슨 강경, 온건이냐"고 비웃었던 적이 있다. 

무엇이 미국과 영국경제를 다시 살렸는지 지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교해 볼 때 진지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레이건 및 대처라는 리더쉽 때문인지, 아니면 뛰어난 브레인 관료들의 국가정책수행 때문인지 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레이건, 대처가 집권하던 시절의 여러경제상황을 동등하게 볼 수 없지만, 정책결정자의 능력과 리더쉽의 부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나라 관료들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그들을 통해서 뭔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지 않나 싶다.

참조  :  조갑제, 레이건, 이렇게 소련을 붕괴시켰다.
              이희철, edaily 레이건 리더쉽
              장영신 : 마가렛 대처 - 영국 전 총리
              마가릿 대처- (고승제 著 둥지출판사 199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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