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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웠던 보리밥, 수십년만에 먹어보니
2012-10-10 10:43:18최종 업데이트 : 2012-10-10 10:43:18 작성자 : 시민기자   최종훈

지난번 추석때 일이다. 추석 차례상을 물리고, 성묘를 다녀온 뒤 형님이 갑자기 형수님더러 보리밥좀 해 먹자고 한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쳤다. 
"형님은 그 보리 지긋지긋하지도 않아요?"

아우의 큰 소리에 놀란 형님. 눈을 크게 뜨고 '저녀석이 왜 그래 갑자기?' 하는 그런 표정이다.
 형님의 놀란 얼굴을 보자 그제서야 내가 좀 오바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뒷통수를 만지며 "형님, 명절날 맛있는 음식 많은데 웬 보리밥이세요? 형수님 힘드시게요."라며 짐짓 멋쩍어 했더니 형님은 그제서 내 표정을 읽고는 그냥 풀썩 웃어 주셨다.

내가 나도 모르게 소리친 이유, 그리고 형님이 그래도 금세 동생이 왜 그렇게 큰 소리로 반발(?)을 했는지를 그 이유는 굳이 말로 안해도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형제들이 어렸을적인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부터 고교 시절까지 내가 살던 시골은 쌀보리가 유난히 많이 나는 고장이었다. 사실 보리는 내 고향뿐만 아니라 당시에 쌀밥만 먹기 힘들던 시절이기에 정말 보리 재배가 필수였고, 나보다 더 나이가 드신 웃어른들은 물론이려니와 부모님 세대때는 그 보리밥을 드시느라 보릿고개라는걸 겪을 정도였다 한다.

해마다 오뉴월이면 논에 누렇게 익은 보리를 보며 어떤 이는 즐거워했을지 모르지만 나만은 '언제 저 보리를 다 베어 탈곡하고 또 건조하여 수매까지 하지' 하는 끔찍한 생각을 먼저 해야만 했다. 
보리 타작하고 거두어 들이는 농삿일도 유난히 싫어 했고, 그 까칠까칠한 보리밥을 먹는 것은 더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다. 당시에 농부들이 다 가난하기는 했지만 우리 집은 유난히 더 심했다. 
그래서 대부분 남의 논을 빌려 이모작 농사를 지었다. 그 중 보리농사는 논 주인에게 그 댓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는 보리농사에 매우 집착을 하셨다. 보리를 수확하여 햇볕에 말리고 그것을 다시 바람을 이용하여 정제한 뒤 일정량을 포대에 담아 농협수매를 하면 끝나는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오월의 햇볕 아래 보리 베기부터 칠월의 수매까지 이런 작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렇게 수매한 돈으로 아버지는 농협 빚도 갚고, 벼농사 지을 비료와 농약도 사고, 나의 학교 수업료도 내주셨다.
이미 어릴때부터 농삿일을 시작하였고, 오직 배운 것이 농사일밖에 없기 때문에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다짐하던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에게 농사일 그만두고 도시에 나가 장사를 하든지 아니면 건설 노동일을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자주 투정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변함없이 보리농사를 계속 지으셨다. 

그렇게 보리라면 이를 벅벅 갈던 내 속사정도 모르면서 결혼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날더러 보리밥을 먹자고 한적이 있었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물론 배부르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후로도 아내와 함께, 혹은 직장이든 지인들과 만나서도 나는 보리밥을 사 먹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당뇨병 환자가 된다 하더라도 보리밥은 먹지 않을 것이라고 단단히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건만 나의 그런 성격과 달리 형님은 그래도 건강 생각해서 가끔 보리밥을 만들어 드시거나 사서 먹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추석날 점심은 보리밥을 해 먹자고 하신 것이고, 그나마 보리밥을 잊고 지내던 나는 형님의 한마디에 과거 일에 의한 트라우마가 발생해 버럭 소리를 친 것이다.

내 생각이야 그렇다 쳐도 온 가족이 건강식이라며 모두 다 보리밥에 대찬성을 보였고 결국 그날 점심은 정말 보리밥 열무 된장찌개 정식이 차려져 나왔다.
어? 그런데 먹기 싫어 하는 나를 꼬드기며 참기름 넣고 싹싹 비벼서 내 입에 넣어 주는 아내 덕분에 한입 꿀꺽 받아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실로 수십년만에 먹어보는 보리밥이었건만. 
'사람들이 이 맛으로 보리밥을 먹는걸까?'
혼자 꿍꿍이 속을 해가며 슬슬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거봐요. 맛있지? 푹푹 떠 먹어보라니까요." 하며 아내가 연신 재촉을 했다.

그 사이 다른 가족들은 정말 열심히 보리 비빔밥 양푼을 비우고 있었다. 결국 나도 본격적으로 숟갈을 잡고 시작했는데... 아, 정말 꿀맛이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건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다시 수십년만에 보리밥을 제대로 먹어 보았다. 오랜만에 먹으니 과거의 트라우마는 사라지고 건강식의 행복한 느낌만 다가왔다. 앞으로는 보리밥을 사랑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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