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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 슬픈 운명을 예찬하다
삶의 부스러기를 떨어내고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
2008-10-15 19:45:27최종 업데이트 : 2008-10-15 19:45:2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멀리 산마루에서 시작된 가을이 도심으로 밀려왔다. 여름내 푸르던 영혼들이 불그스름한 빛에 물들었다. 하늘도 매일 한 자락씩 높아져서 아예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구름도 힘에 겨운 듯 드문드문 보인다. 
좀처럼 식지 않을 줄 알았던 날씨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 몸을 식히며 우리 곁에 온다.  

우리는 여름을 흘려보내고 가을을 맞이했다. 세월은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이다. 
흐르는 세월이 있어 지나간 시간은 추억으로 남고, 우리는 늘 새로운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세월이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멘트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가을, 그 슬픈 운명을 예찬하다_1
가을, 그 슬픈 운명을 예찬하다_1

우리는 모두 고향을 떠나 정겨운 가을 풍경을 잊고 살지만 가을은 그 자체만으로 풍족하다. 생각을 넓혀보면 삭막한 도심에서도 넉넉한 가을을 만나게 된다. 
저녁 밥상을 물리고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으면 베란다 창으로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실려 온다. 달빛이 바람을 따라와 베란다에 있는 어린 군자란을 어루만진다. 그러면 유독 어머니의 사투리가 그리워진다.

아파트 마당에는 고추가 점령했다. 햇볕에 제 몸을 그을리려고 벌겋게 누워 있는 고추가 시골 마당 풍경을 연상케 한다. 고추를 널어놓은 할머니의 시름까지 말리는 가을볕이 따사롭다. 
화단만큼 시간이 성실하게 쌓인 곳도 없다. 나무의 몸이 봄보다 덤턱스럽게 컸다. 감나무도 노란 감을 훈장처럼 매달고 있다.

거리의 나뭇잎은 온몸을 뜨겁게 달궈 한껏 자태를 뽐낸다. 하루해도 일찍 지쳐서 꺾인다. 밤이면 어둠살을 헤집고 다니는 달빛은 더욱 노란색으로 물든다. 잔뜩 살이 오른 달빛은 까치걸음을 종종 거리며 새벽녘까지 노닥거리며 거리를 활보한다. 

가을에는 유독 거울을 많이 본다. 다른 계절에는 아침에 거울을 보지만, 가을에는 저녁에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봄에는 겉모습을 비춰보지만, 가을에는 마음을 비춘다. 

가을이 여름을 밀고 왔듯이 이 가을도 마지막으로 붉게 타고 나뭇잎을 허무하게 떨어뜨려야 하는 운명에 있다. 산과 나무도 자랑처럼 가지고 있던 숲과 잎을 버려야 한다. 

화려한 일생을 마감하는 대자연 앞에서 우리는 쓸쓸한 정서를 담는다. 자연이 스스로 생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광경은 허무와 쓸쓸함이 함께 인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쓸쓸함만 있단 말인가.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씨를 흩날리는 생명체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자연의 이치다. 

가을은 생명이 다시 생명의 씨앗을 남기는 자연의 섭리가 진행된다. 떨어지는 잎은 생명이 다한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지의 자양분이 되어 더 큰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화려하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내려가야 하는 아픔도 있다. 때로는 그늘이 드리우고 고통이 따른다. 더욱이 삶이란 기쁨을 주는 듯 하다가 예기치 못한 슬픔이 밀려온다. 
순식간에 밀어닥친 삶의 그림자, 가정의 불행으로 절망이 오고 질병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이 모두가 우리를 비틀거리게 하고, 삶의 행로를 어둡게 한다. 

그러나 슬픔을 딛고 일어나는 존재가 인간이다. 실패의 끝은 성공이라는 말처럼, 좌절의 늪은 우리를 영원히 가두지 못한다. 실패를 찬란하게 극복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 어느 꽃보다 아름답다. 
최근 가난하다고 혹은 삶이 힘겹다고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큰 나무도 여름의 사나운 폭풍을 이겨냈듯이 인간에게 어려움은 성숙해 가는데 만나게 되는 삶의 일부이다. 
인간에게 어려움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응어리를 내려놓으면 삶의 새로운 방편을 찾게 된다.   

우리 곁에 잠시 머무는 가을은 그 슬픈 운명이 쓸쓸해서 더욱 좋다. 가을은 우리의 실패와 슬픔조차도 치유할 수 있는 쓸쓸함이 있어 좋다. 텅 빈 충만이 삶의 진리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어 감동적이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자태가 오만하지 않고 천박하지도 않은 가을을 좋아한다. 가을은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청순하고 숭고한 이미지다. 마치 고결한 인격을 지닌 선비의 아내 같은 계절이다. 

이 가을에 잎을 떨어내며 헐벗은 알몸으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나도 삶의 부스러기를 떨어내고 겨울을 준비해야겠다. 
이듬해에 나이테를 늘려 더 크고 화려한 나무가 되듯, 나도 겨울을 이겨내고 더 성숙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윤재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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