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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걷다(1)
<출동! 시민기자> 여명 2월 20일
2008-03-05 17:58:54최종 업데이트 : 2008-03-05 17:58:54 작성자 : 시민기자   김형효

밤새 개 짖는 소리, 카트만두에서는 개 짖는 소리를 밤 새 들을 수 있다. 
비 오는 날은 비교적 조용하다. 아마 그들도 감상에 젖나보다. 힌두 의식에 따라 해 뜨기 전 시간에 그들의 기원은 시작된다. 그 시간이면 카트만두는 잠에서 깬다. 여명의 기원을 시작하자는 부산스런 종소리가 울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여행자인 나도 의지와 상관없이 깨어났다.

안나푸르나를 향해 출발한다는 설레임과 약간의 긴장감에 선 잠을 청하며 아침을 맞는다. 
간단하게 미역국에 찬밥을 말아먹고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옥상에 있는 방이니 바로 바깥에 나가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며 몸을 푼다. 간단한 아침체조를 하는 것이다. 

시간은 6시 30분. 어제 꾸려 놓은 짐 꾸러미를 다시 점검하고 막 이웃에 밀런에게 가려는데 나의 가이드 다와가 내가 머물고 있는 집에 들어섰다. 
그의 이름 다와(dawa)는 달(moon)을 의미한다. 나는 그와 함께 밀런 집에 가서 밀런과 함께 찌아를 마시며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밀런은 2000년 10월에 여행자로 입국했다가 불법 체류했던 네팔인 이주 노동자다. 
정부에 정책으로 불법체류 기간부터 5년 동안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부여받았다. 합법적인 체류자로 인정받고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노동을 하던 친구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으로 기억된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걷다(1)_1
인중(지헤의 샘 혹은 제3의 눈)에 디까를 붙여주며 무사한 여행을 기원하는 힌두교 성자!


한국에서 대학공부를 하던 쁘러단 수버드라라는 네팔인 여자 친구를 통해 그를 소개 받았다. 
당시 출판사를 하던 내게 그는 네팔인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당시 22세였던 그가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적극적으로 그를 도우려했다. 물론 한국사람 중에서도 네팔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배울 수 있도록 만들자는 제안도 했다. 
나중에 기획을 함께 했고 책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인쇄하고 출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어렵사리 운영해가던 시전문지를 움켜쥐고 허덕이던 때고, 그는 이주노동자 신분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네팔에서 책을 인쇄하였다. 후일 책을 받아보고 무리를 해서라도 한국에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아직도 그 책은 네팔 이주노동자들에게 유익한 책으로 읽히고 있으니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

다시 내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돌아와 주인집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출발했다. 밀런의 사촌 형이기도 한 헤므라저 형님과 그의 부인과 아들, 딸 등이 무사한 여행을 빈다고 말했다. 

아침 7시 10분경 겅거부를 향해 걸었다. 8시 15분이 되었다. 당초 8시 마이크로버스를 타기로 되었으나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되어 다와에게 물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그는 원래 8시 30분 버스였다고 일러주었다. 버스는 8시 30분에 도착하였고, 탑승을 하고 짐을 챙겨 싣는 시간이 걸려서 예정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출발하였다. 다와는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인 베시샤하르(Besishahar)에는 오후 3시경에 도착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출발 전 힌두 성자가 장거리 여행객들에게 무사안위를 빌어주는 기원을 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이마의 중심에 꽃을 으깨어 만든 디까를 붙여주는 의식을 치러준 댓가로 다와를 통해 5루피를 지불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걷다(1)_2
네팔 전통악기 사렁기를 연주하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주는 어린이


카트만두의 혼잡을 벗어나며 외곽으로 접어들면서 조금 홀가분해지길 바랐다. 그러나 여전히 도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바자르(상점)들과 인파로 복잡스럽게 보이는 곳이 많았다. 그렇게 마이크로버스에서 피곤한 삶의 일상을 바라보다 지쳐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계속해서 마티(고갯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끝 모르고 오르막길을 달리는 버스를 보니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대로 하늘에 닿을 것 같다는 엉뚱 맞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천상에 닿을 듯 내달리던 버스가 마주 오는 수많은 트럭들과 엇갈릴 때는 순간적인 짜릿한 스릴과 아찔한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런 긴장감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길을 간다. 이 길은 카트만두 서부로 향하는 길, 즉 인도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인도를 통해서 들어오는 수많은 공산품들의 주요 보급로다. 그래서 수많은 트럭들이 오고가며 부산스럽게 내달리는 것이다.        

차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은 한결같다. 그것은 그 동안 수많은 네팔사람들이 함께 조각해놓은 산 풍경의 절묘함이다. 바로 천상을 향한 계단들이다. 
그들은 아무래도 오래 전부터 하늘을 향한 아니 그들만의 제단을 만들어 오고 있었던 듯하다. 네팔 어느 곳엘 가도 바라볼 수 있는 그 천상의 계단들 때문에 네팔을 일컬어 신들의 나라 혹은 샹그릴라라고 일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네팔 어디를 가도 바라 볼 수 있는 마티(고갯길)와 덜러(언덕길)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는 더 없이 신비로운 것이다. 어쩌면 그 신비를 더하는 것은 가도 가도 마티(고갯)이며, 가도 가도 덜러(언덕길)이다. 
어쩌면 네팔 전체가 하늘이요.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의미를 무색하게 하는 데 바로 그런 모습이 더욱 더 큰 신비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길가에 즐비한 흙집들, 그리고 아이들, 사람들이 언제라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 세상 어느 누구라도 반겨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들은 아마 외계에서 온 외계인들이라도 반겨줄 것만 같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멈춰 섰다. 드하락케(Dharka)라는 곳에 도착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쉬어가는 곳이다. 
우리나라처럼 고속도로 휴게소 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은 네팔에서는 우리 눈에 마치 노점에 세우고 식사를 하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별히 불편을 토로하는 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 방식대로 질서 있게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는 생각에 간단하게 삶은 계란과 빵 그리고 콜라로 식사를 대신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걷다(1)_3
꺼리나 구릉이라는 어린이, 저물 무렵 어머니를 찾으며 애타게 울며 여행자를 애태웠던 아이

앞으로 4시간을 더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낯선 풍경들이 흥미롭지만, 그 흥미로움은 오래가지 못해 안타까움으로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안다(知)는 것이 어쩌면 크나큰 아픔일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다고 그 앎을 포기하는 것은 아픔을 방치하는 것이며 더 큰 아픔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생각을 반복하였다. 
어쩌면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며 안다는 것 또한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 사유의 혼잡을 경험하며 번민에 휩싸였다. 
그렇게 한참을 갔다. 전체가 협곡으로 이어져서 물줄기가 보일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금세 물 흐르는 계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곡의 크기에 비해 조금씩, 조금씩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 후 물 흐름이 좋아지면서 고통의 물줄기도 커져 보이는 것을, 계곡의 중간 중간에 큰 돌들을 망치로 두드려 잘게 부수는 모습들이 눈에 띠었다. 
자갈을 만드는 일에 남녀노소가 없었다. 그 사이사이로 가난한 사람들, 가난 속에서도 극악할 정도의 가난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의 작은 움막들이 보였다. 

실제로는 지상에 있지만, 마티(고갯길)길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천상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상상해보게 된다. 길이 멀다. 
그저 서울에서 부산거리지만, 곳곳마다 바리케이트가 쳐져있고 중무장한 병력이 검문을 해대기 때문이다. 검문을 할 때마다 다와 쉐르파를 비롯한 네팔의 젊은이들은 차에서 내려 걷고 이방인 관광객과 노인들만 자리에 앉은 체 바리케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기를 일곱 차례 정도 반복한 후, Last!란 말이 귀에 들어왔다.

이제 15분 정도만 더 가면 오늘 묵을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베시샤하르(Besishahar)에 도착한다고 했다. 
잠시 후 카트만두 외곽 풍경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다와는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내리라 했다. 
그러니까 이곳이 해발 800미터가 넘는 마을인 것이다. 내가 태어난 마을에 제일 높은 산이 해발 120미터인데 그 어린 시절의 큰 산보다 무려 7배 가까이 높은 고지에 올라와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평지와 다름이 없다. 이제 고지를 체험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이 평지에서 시작해서 15박 16일의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 싱겁다. 아무튼 여행 준비를 단단히 하긴 했으니 앞으로 이 긴장과 설레임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숙소인 에베레스트에 짐을 풀고 간단히 샤워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미리서 국립공원 안나푸르나 입장권을 구입했다. 4000R,S(루피), 우리 돈으로 5만원이 넘는 돈이니 네팔 화폐가치로 치자면 굉장히 비싼 편이다.

입장권을 구입하는 데도 두 장의 여권용 사진이 필요했다. 한 장은 내가 휴대하게 되는 입장권에 붙이고 한 장은 관리사무소에 입장객 서류에 붙였다. 
사실 공항의 입국절차보다 좀 까다로운 것 같다. 공항에서도 우리 돈 3만원(30달러)을 지불하고 사진은 한 장만 붙이고 비자를 받고 입국한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걷다(1)_4
목화(cotton)라는 나무에 핀 꽃......, 이렇게 큰 목화나무가 있는가?

안나푸르나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다. 
안나(버팔로), 푸르나(머리에 많은 눈이 쌓인 모습), 그러니 안나푸르나라는 뜻은 "버팔로 머리 위에 많은 눈이 쌓인 모습을 하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풍요를 상징하기도 한다. 

눈을 네팔 말로 옮기면 "융"이라고 하는데 융은 풍요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풍요의 여신"이라는 예명도 있다. 
거네스(코끼리 신) 히말은 "코끼리 모양을 한 산", 코끼리는 힌두 신 중에 하나로 코끼리 신의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에베레스트는 "예띠(YETI) 신이 머무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예띠(쉐르파어로 예띠는 대체(DECHE))란 쉐르파의 언어를 사용하며 살았던 쉐르파 종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쉐르파 종족어로 옮기면 자모롱모(JAMOLONGMO)이다. 자모롱모란 "높은 산"이란 뜻이다. 
자모는 산(히말)이요, 롱모는 높다는 뜻이다. 네팔어로는 사가르마타라고도 한다. 마나까마나(MANAKAMANA)히말은 "마음으로의 기원"을 뜻하며 마낭(MANANG)은 네팔인들에게 진정한 샹그릴라(이상향)로 알려진 곳인데 이곳은 쉐르파들의 집단주거지이다. 
그들은 마낭계라 하여 자신들만의 결집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흔히 몽골리안에 속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의미의 쉐르파는 아니라고 한다. 쉐르파들의 집단 주거지는 이외에도 묵디낫, 무스탕, 랑탕, 마르파, 좀솜 등이 있는데 모두 아름다운 곳이며 네팔의 주요관광지들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특별한 볼거리들은 없었다. 너무나 익숙하게 보아온 풍경들뿐이다. 그래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누워서 휴식을 취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밖에서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슬피 우는지 그 사연이 궁금할 정도였다. 나는 하는 수없이 밖으로 나가 그 아이를 달래며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칠 줄 모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한참이 지난 나중에 울음을 간신히 그친 아이에게 왜 그러는가 물었더니 엄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의 아이들이 해질녘에 어둠이 찾아들면 어머니를 찾으며 울음을 울듯이 그도 그런 것이었다. 나만 긴장이 컸던 듯하다. 울음을 달래려 애쓰며 가지고 갔던 비스켓을 쥐어주었던 것을 그제 사 먹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거리나 구릉(Kareena Gurung)이며 다섯 살이라고 했다. 저녁 식사 후,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강행군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긴장감도 덜어야겠기에 일찍 잠을 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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