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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임란초기 '수원수성(水原守城) 17대책'을 상소한 경기감사 권징
2007-12-02 03:16:35최종 업데이트 : 2007-12-02 03:16:35 작성자 : 시민기자   권영갑

권징이란 분이 있었다.서기1538년 출생(중종33)한 선조 때의 문신으로 호는 송암(松菴)이다.  

1558년(명종13년) 사마시에 3등 급제한 후 1562년(명종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한림에 있을 때 직필(直筆)로 진언 하였으며 문정왕후가 크게 불사(佛事)를 일으킬 때에도 임금의 명령에 부당함을 논박 하였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승진 하지 못하였다가 1568년(선조1)에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580년 우승지가 되었다.
1583년 경기, 충청감사를 거쳐, 1586년 형조참판, 1588년 함경도 관찰사 이어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다시 경기감사에 부임중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경기감사로서 수원을 지키며 적과 대전하는데 필요한 17대책 계책을 상소한 바 있다.
내용은 왜군을 남쪽으로 쫓아낸 다음  부산에서  왜군을 방어할 12계책이었다 

모두 채택되었지만 워낙 큰 군사력의 차이로 인해 역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왜란 다음해 나라에서는 군량미를 각 전선에 공급하는 막중한 책임관의 명을 받아 몸소 양식을 메어 나르는 솔선수범을 하여 불평하는 자가 없도록 하였고, 또 어명으로 남북을 경계로 동궁호시(彤弓弧矢)를 하사받아 민심을 안찰케 했다. 

선조15년 임오년에는 병조판서를 제수 받았으며, 선조 21년에는 의병장 조헌을 비호한 일로 체직 되기도 했으며, 11월17일 파직된 의병장 북병사 이일을 구하여 복직 시키기도 했다.
1593년 공조판서·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주장하는 화의에 반대하여 명군의 힘을 빌지 않고 의병을 모아 부산에서 적과 싸울 것을 재차 상소하였다.  

왜난을 피해 궁궐을 떠나 몽진하는 선조를 호종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우계 성혼과 도의지교(道義至交)를 맺어 교우하였다,
지루한 7년간 전쟁이 끝나는 선조 31년 3월 13일  61세로 별세했다. 

조정에서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이사로 증직 시켰다 
백현 이경석이 행장기를 지었으며, 우암 송시열이 비문 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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