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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하고 노여웠던 우리들의 시대
수원학 심포지엄 열려…3.1운동과 독립운동에 진정한 가치
2019-11-12 14:21:44최종 업데이트 : 2019-11-12 14:21:43 작성자 : 시민기자   김낭자
모임

수원학 심포지엄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가운데 줄 왼쪽부터 이승렬, 이혜영, 김영숙, 한동민, 박철하, 황민호, 이동근, 유지아, 이현주)

수원화성 박물관에서 7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제6회 수원학 심포지엄 '참담하고 노여웠던 우리들의 시대'가 열렸다.
 
최병대 수원시정연구원장은 개회사에서 "금년 한 해는 특별한 의미 있는 해이고 날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세기가 지나간다. 주제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참담하고 노여웠던 우리들의 시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시간이다. 핵심적인 주제는 근대 일제 강점기에 협력의 길에 선 수원 지역의 시대의식과 고민을 추적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인 수준과 후대의 역사적 평가를 통해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진정한 가치를 재조명하는 그런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최병대 수원시정연구원장, 박환 3·1운동추진위 위원장, 오성덕‧김봉집부위원장과 오산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변기재 님의 아들 변순용(변기재의 3남 1녀 중 3남)선생 부부 등이 참석해서 발표와 토론을 지켜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했던 변기재 님은 6·25 때 공산주의 이념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승렬(역사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3.1운동과 수원 로컬리티에 심포지엄을 하고있다

이승렬(역사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3.1운동과 수원 로컬리티에 심포지엄을 하고 있다

'3·1 운동과 수원 로컬리티'라는 주제로 이승렬 역사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발표가 있었다. 이승렬 선임연구위원은 수원의 3·1운동을 거론할 때 중요한 세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첫째로 수원지역이 3·1운동 초기부터 시작해서 4월 중순까지 만세시위가 꾸준하게 이어졌다는 점, 둘째는 그 선상에서 제암리 및 수촌리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는 점, 마지막으로 3·1운동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48인'중의 한 명인 김세환에 관한 점을 꼽았다.

김세환은 1939년에 삼일학교를 살리기 위해 수원갑부 최상희로부터 2만원의 기부금을 받아내기도 했으며 1941년에 홍사문과 함께 화성학원을 수원상업학교로 전환하는데 관여했다.

이 위원은 "3·1운동의 시위 과정에서 나타난 '우발적 폭력'의 '급진성'을 너무 강조해도 안되고,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계획적 기획 폭력'의 '잔인성'을 간과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수원 로컬리티의 미시적 요소들은 민족 혹은 국가라는 단위의 역사 담론에 내재되어 있는 도식적인 이항대립을 넘어서서 화해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풍부한 이야기들의 원천임을 강조했다. 이어 로컬리티는 단순하게 '중심'에 대해 '주변'의 저항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을 통해 역사의 진전을 위한 토대라고 밝혔다.
이혜영(화성시청 학예사) 홍면옥의 독립운동과 생애에대한 발표를 하고 있다

이혜영 화성시청 학예사가 홍면옥의 독립운동과 생애에 대한 발표를 하고 있다

이어서 '독립운동가 홍면옥의 독립운동과 생애'에 대한 주제로 이혜영 화성시청 학예사의 발표가 진행됐다.

송산면에서 일본인 순사 2명이 시위대에 의해 타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염전, 농토에 대한 수탈이 격렬한 만세운동의 원인이었다.  이혜영 학예사는 3·1운동 관련 자료, 증언자료 등을 바탕으로 송산지역 3·1운동,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홍면옥과 송산지역의 네트워크를 살펴보고 출옥 이후 홍면옥의 활동과 해방공간에서의 홍면옥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 언급했다.

1919년 3월 26일, 구장 홍면선의 집에서 홍효선이 다른 지역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도 부르자는 제안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오후 2시경 면사무소 뒷산에서, 오후 4시경에는 주민 100~200명이 송산면 사무소로 몰려가 구한국국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저녁에 서신면 방면으로 행진해 밤 11시경에 해산했다. 1919년 3월 28일 사강 장날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송산면 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구한국국기를 앞세우고 조선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3월 28일 5시경 홍면옥, 홍준옥, 김명제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송산면의 만세운동은 '비폭력적 평화주의'라는 3·1운동 대의 명제에 균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송산면의 만세운동은 오랜 세월 집적된 지역적 혈연적 관계망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3.28 홍면옥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처음에는 홍면옥과 몇몇 마을의 지식인들이 추동하고 송산면 민들의 강고한 유대감과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전개되었다. 치열했던 해방공간의 정치적 지형에서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염원이 점차 현실적으로 구체화 되었던 것으로보인다.김영숙(동아대 연구교수) 일본 제국주의의 3.1운동 탄압과 제암리사건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김영숙 동아대 연구교수가 일본 제국주의의 3.1운동 탄압과 제암리사건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5분간의 휴식 후 다시 3시 20분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3·1운동 탄압과 제암리 사건'이라는 주제로 김영숙 동아대 연구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김영숙 연구교수는 제암리 사건에서 ▲일본군의 군대증파의 원인과 그 내용 ▲제암리 사건의 경위와 외부로 알려지는 과정 ▲일본제국주의의 제암리 사건 책임자 은폐내용 등에 대해 분석했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보병대대는 1919년  4월 10일을 전후하여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때 일어난 사건중의 하나가 제암리 사건이다. 4월 17일에 일본군이 기독교인들을 교회에 가둔뒤 집중사격하여 모두 죽인 후 교회건물에 불을 질렀다.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들에 의해 현장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외 언론에까지 소개되어 일본제국주의 3·1운동 탄압의 상징적인 사례가 된 것이다.

조선군 사령관과 조선 총독은 사건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알려지자 육군과 척식 국장관, 수상에게 보고하는 한편 사건 은폐 및 축소를 꾀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단 한명의 일본군도 처벌하지 않고 사건을 덮어 버렸다. 제암리 사건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3·1운동 탄압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한국인에 의한 구술조사와 정확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한국 학계의 과제로 남았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관장의 일제 강점기 정항적 지식인 박승극에 대해 강의하고있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관장의 일제 강점기 저항적 지식인 박승극에 대해 강의하고있다

'일제강점기 저항적 지식인 박승극'이라는 주제로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의 발표가 있었다. 박승극은 1920년대부터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운동가였다. 수원지역에서 1920년대 말까지 김세환의 시대였다면 1928년 검속 이후 박승극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뜨거운 '울트라(ultra)였다.

1930년은 격동과 파란의 한 해였다. 당시 박승극은 수원청년동맹 집행위원이자, 조선 총동맹 중앙위원이었다. 그의 역할만큼 일제의 탄압 또한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932년 11월 수진 농조 사건으로 구속된 박승극을 비롯 김영상, 장주문, 이원섭 등은 1933년 무죄 석방되었다. 경찰이 공모하여 날조한 것이 밝혀지면서 1년 6개월 만의 일이다. 1928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 1929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소설 '농민'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박승극은 1933붓대를 꺾고 싶을 정도라는 심정을 토로하지만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이러한 지속적 글쓰기를 통해 중앙문단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가 있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자!'는 슬로건으로 붓을 든 혁명가를 꿈꾸었지만 현실을 녹녹치 않았다. 농민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쓰면서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일제강점기를 버티고 있었다.

주제 발표에 이어 토론회는 간단하게 진행됐다. 이동근(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홍면옥의 독립운동과 생애'라는 발표문을 통해 "송산면 3.1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향촌사회 질서를 일제가 어떻게 무너뜨렸으며, 그것이 혈연으로 연결된 공동체 조직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주요 요인임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지아(원광대학교) 일본제국주의의 3.1운동 탄압과 제암리 사건에 대한 토론을 하고있다

유지아 원광대학교 HK 연구교수가 일본제국주의의 3.1운동 탄압과 제암리 사건에 대한 토론을 하고있다

유지아 원광대학교 HK연구교수는 토론에서 "일본이 제암리 사건 책임자에 대한 조치를 은폐한 후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미국과 외교 선교사들은 어떤 후속 조치를 취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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