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반갑다, 수원화성 북지(北池)
수원화성 축성 당시 흙 조달한 북지 복원 예정
2019-04-24 09:16:15최종 업데이트 : 2019-04-24 09:10:51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북지 자리,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 성 안에 있었다.

수원화성 북지 자리,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 성 안에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화성은 팔달문, 장안문 등 4대문, 화홍문 등 수문, 화성장대 등 장대, 포루, 서북공심돈 등 공심돈, 각루, 봉돈 등 50여개의 시설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라가 망해서 무너지고 전쟁으로 무너져 많은 시설물이 파괴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 대부분의 시설물이 복원 되었다.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한 시설물이 있는데 수원화성 안에 팠던 연못 5곳과 은구 2곳, 중포사, 팔달문 좌우에 연결되었던 시설물인 남동적대, 남암문, 남공심돈, 남서적대 등이다. 이들 시설물은 의궤의 도설 속 그림으로만 볼 수 있는데 남공심돈, 남암문과 수원천 주변 성벽은 헤르만 산더가 찍은 1907년 사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으로 복원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 본다.
수원화성 북지 자리,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 성 안에 있었다.

수원화성 북지 자리,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 성 안에 있었다.
수원화성 북지 자리,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 성 안에 있었다. 화성전도 6폭 병풍에 그려진 북지 모습

수원화성 북지 자리,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 성 안에 있었다. 화성전도 6폭 병풍에 그려진 북지 모습

『수원화성은 1794년 1월 7일 돌 뜨는 공사를, 14일 표지를 세워 성터를 정했고, 25일 성터를 닦으며 축성공사를 시작했다. 2월 28일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 남수문 지을 터를 닦았다. 3월 1일 도랑 치는 일을 시작했고 14일 상남지, 16일 북지를 파기 시작했다. 29일에는 도랑 치는 일을 마치고 4월 1일 상남지 파는 것을 마치고 4일 북지 파는 것을 마쳤다. 4월 7일 하동지 파는 것과 북성을 쌓기 시작하고 16일 남성을 쌓기 시작하고 21일 하동지 파는 것을 마쳤다.』


화성성역의궤 앞 부분에 나오는 기록인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못 느꼈다면 날짜에 주목해 몇 번 더 읽어보면 명백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수원화성 축성에서 제일 중요했던 것 중 하나가 도랑을 치는 일과 연못을 파는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수원화성 북지 자리에서 바라본 북포루

수원화성 북지 자리에서 바라본 북포루

성터를 닦으면서 도랑치는 일과 연못을 판 이후에 북성(장안문 동서쪽 성벽)과 남성(팔달문 동서쪽 성벽)을 쌓기 시작했고 7월 9일 화홍문 주춧돌, 15일 장안문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여기서 도랑 치는 일이란 화홍문 밖 5~600백보, 화홍문에서 남수문까지 750보(약 877m, 1보는 약 117cm), 남수문 밖으로 약 150보까지 너비 20보(약 23m) 깊이 약 반 장에서 1장(약 3m)으로 수원천 준설을 했다는 것이다.

홍수에 대비함과 동시에 여기서 나온 모래와 자갈을 성터 닦는데 사용하기 위해 가장 먼저 도랑 치는 일을 한 것이다. 성을 쌓기 전에 5개의 연못을 판 것은 성벽에 들어가는 막대한 양의 흙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야말로 실탄을 준비한 후 전투에 나간 격이다. 방화수나 정원은 그 이후의 개념이다.
수원화성 북지 자리에서 바라본 북서포루

수원화성 북지 자리에서 바라본 북서포루

팔달문 안 팔달산 방향에 있던 상남지는 못의 너비가 사방 40보, 깊이 6척이고 가운데 작은 섬이 있었으며, 하남지는 너비 40보, 길이 60보, 깊이 7척이었으며 가운데 작은 섬 둘이 있고 홍련과 백련을 심었다. 두 못의 사이에는 정자가 있었다. 흙으로는 성을 쌓고 연못에 연꽃을 심어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수원천 동쪽 매향동 어귀에 있던 상동지는 남북 길이 58보, 동서 너비 50보, 깊이 7척, 마름과 연꽃을 심었고 가운데 작은 섬이 있었다. 하동지는 구천의 북방에 있는데 사방 37보, 깊이 4척이었다.

북지는 북은구 안에 있는데 성 밖 도랑의 물을 끌어 대었기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고 사방 30보, 깊이 5척이었다. 북지는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에 있었다. 장안문 서쪽의 북서포루에서 90보 되는 위치에 북은구가 있었고 북은구 서쪽 37보 되는 곳에 북포루가 있다. 북서포루 안 잘생기고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나 북포루로 가다보면 왼쪽에 공터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북지(北池) 자리다.
1907년 헤르만 산더가 찍은 사진, 사진 속에는 수원천 주변 성벽, 남공심돈, 남암문, 팔달문, 팔달산 모습이 잘 보인다.

1907년 헤르만 산더가 찍은 사진, 사진 속에는 수원천 주변 성벽, 남공심돈, 남암문, 팔달문, 팔달산 모습이 잘 보인다.

영산홍이 곱게 핀 날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가 '수원화성 북지 터' 안내간판을 봤다. 안내간판은 한글본 정리의궤 권39 성역도 속의 채색본 화성전도 그림에서 북지 부분을 소개했다. 수원화성 축성시 연못의 규모, 의미 등에 대해 소개해 놓고 수원시는 수원화성의 옛 경관을 회복하기 위해 2010년부터 남지와 북지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북지 터의 발굴조사를 통해 연못의 조성형태를 파악하고 복원정비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남지와 남공심돈 터에도 이와 같은 문화재 안내간판이 필요하다. 특히 남공심돈은 멋진 사진자료가 있는 만큼 사진을 찍은 위치에 사진을 첨부한 안내간판을 세우고 '남공심돈이 복원되기를 희망한다'는 글귀를 넣는다면 제격일 것이다. 문화재 복원은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진정성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한정규님의 네임카드

수원화성 북지, 남지, 동지, 한정규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