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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 신입생 환영해요
정조대왕 당시 화성유수 지낸 서유린 묘비 등 유물 들어와
2019-07-25 10:26:57최종 업데이트 : 2019-07-25 10:20:11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들, 왼쪽부터 서명구 신도비, 서명구 묘비, 서유린 묘비

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들. 왼쪽부터 서명구 신도비, 서명구 묘비, 서유린 묘비

얼마 전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낯선 비석 3점이 나타났다. 박물관을 자주 가다보니 어떤 유물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손바닥을 보듯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비석이 들어온 것이 눈에 띈 것이다. 수원박물관 입구 맞은편에 비석 3점이 나란히 서있어 글씨를 읽어봤더니 뜻밖에도 오른쪽 비석의 주인공이 서유린 이었다. 가운데와 왼쪽의 비석은 서유린 할아버지 묘비와 신도비였다.

비석에 묻은 흙과 비석 앞에 흩어져있는 연장들을 보니 비석들이 이날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혹시나 해서 수원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해 보니 관련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비석이 들어온 경위에 대해 박물관 측에 문의를 해볼까 하다 나의 관심사인 금석학적으로만 접근하기로 했다.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 서유린 할아버지인 서명구 묘비, 한석봉 해서체를 집자한 것이다.

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 서유린 할아버지인 서명구 묘비, 한석봉 해서체를 집자한 것이다.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은 1766년 문과에 급제하고 부교리,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호조판서,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고 수원화성 축성을 담당한 조심태(趙心泰, 1740-1799)에 이어 제4대 화성유수(1797년 7월 – 1800년 11월)를 역임해 수원과는 각별한 인물이다. 서유린은 글씨를 잘 써 1795년 9월에 화서문 상량문을 직접 짓고 쓰기도 했다.

서유린 할아버지 서명구(徐命九, 1692-1754)는 1717년 문과에 급제해 세자시강원 사서, 대사헌, 경기관찰사,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서명구 묘비와 신도비는 금석문에 관심이 갔다. 묘비 전면은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동지춘추관사 달성 서공 휘 명구 우경 지묘 정부인 광주이씨 부우 정부인 고령신씨 부좌(有明朝鮮國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兼 同知春秋館事 達城 徐公 諱 命九 虞卿 之墓 貞夫人 廣州李氏 祔右 貞夫人 高靈申氏 祔左)'라고 씌어있다.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 서유린 할아버지인 서명구 묘비, 김생의 행서체를 집자한 것이다.

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 서유린 할아버지인 서명구 묘비, 김생의 행서체를 집자한 것이다.

묘비의 4면 중 전면은 생전의 관직, 본관과 이름, 부인 두 명을 좌우에 합장 했다는 뜻이다. 전면의 큰 글씨가 놀랍게도 한석봉(1543-1605)의 해서체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조선의 대표적 명필인 한석봉의 비석글씨는 설암체에 바탕을 두고 있어 획이 굳세고 힘차 도산서원 현판글씨를 보는 듯 하다.

묘비의 옆면과 뒷면에는 행적 등을 기록했는데 통일신라시대 김생(金生, 711-?)의 행서체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김생은 서성이라는 왕희지(王羲之, 307-365) 이후의 명필로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 불린 인물이다. 비신의 상부에는 비의 명칭을 새기는데 이것을 제액(題額)이라고 한다. 이 비의 제액은 이양빙(李陽氷)의 전서체를 집자한 것이다. 당나라의 문인이며 서예가인 이양빙은 전서의 대가며 이백의 시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전서체는 읽기가 어렵지만 단아한 멋이 있다.
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 서유린 할아버지인 서명구 신도비, 제액은 이양빙 전서체 비문은 안진경체

수원박물관에 새로 들어온 비석, 서유린 할아버지인 서명구 신도비, 제액은 이양빙 전서체 비문은 안진경체

신도비 제액은 이양빙의 전서를 집자했고 비문은 안진경(顔眞卿, 709-785)의 해서체를 집자했다. 당나라 시대에 구양순에 의해 해서체가 정립된 이후 탄생한 안진경의 서체는 그의 강직한 정신이 반영된 듯 생명감이 넘쳐나면서 굳세고도 힘차 혁신적인 서풍을 이루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안진경체는 조선에서도 널리 사랑을 받았고 정조대왕이 선호했던 서체였다. 수원화성 팔달문이란 글씨도 그 원류는 안진경체에 있는데 '지지대', '축만제', '수원화성 장용영 경계석' 등 수원 곳곳의 비석에서도 볼 수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입구 야외전시장에는 선정비가 여러 개 있다. 선정비란 좋은 정치를 베풀었던 지방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 불망비 등으로 불리며 수원 곳곳에 흩어져있던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선정비 중에는 서유린 선정비도 있어 주목된다. 1831년에 건립한 것으로 비석의 받침돌에는 여러 개의 성혈이 파여 있다. 선정의 증거일까.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선정비들, 여기에 서유린 선정비도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선정비들, 여기에 서유린 선정비도 있다

조선후기의 역사를 보면 많은 고위직이나 지방 수령들이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망국의 길로 갔다. 다산 정양용 선생도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조선이 망국의 길로 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관리들의 부패가 난무하던 시대에 어찌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는 선정비가 이리도 많은지 이해하기 힘들다. 선정비 또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도덕적 부패의 증거가 아닐까. 선정비 중에는 수령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 스스로 만들어준 것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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