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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은 수원 화성박물관 개관 11주년 되던 날
태실과 거중기, 선정비 등 실외전시 돌아보며 개관 기념일 기억해
2020-05-08 14:00:11최종 업데이트 : 2020-06-01 10:54:25 작성자 : 시민기자   이경
수원화성박물관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 (매향동)에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 (매향동)에 있다.

4월 27일은 (1776년 음력 3월 10일) 정조 즉위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2009년 4월 27일 수원 화성박물관이 개관했다.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을 보다 효과적이고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정조는 즉위 날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천명한다. 이는 곧 당파싸움에 얽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효를 다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 속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이산 정조는 11세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13년 만에 아버지의 묘를 화산으로 옮기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축성하였다. 화성박물관에는 축성에 관련된 모든 유물과 자료가 전시 중이다. 

수원 화성박물관에는 화성축성에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전시 중이다. 현재 코로나 19로 휴관중이다.

수원 화성박물관에는 화성축성에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전시 중이다. 현재 코로나 19로 휴관중이다.

오전 10시 휴관 중인 박물관을 찾았다. 올해 개관 11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전시는 작년과 달리 코로나 19사태로 볼 수 없다. 아쉬움에 야외전시실을 둘러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박물관 개관 즈음 복원된 정조 대왕의 태실이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보관하는 것이다.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조의 태를 다음 해 1753년 강원도 영월에 설치했다. 

훗날 1929년 일제 강점기에 관리상의 이유로 태 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한다.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1899년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정조로 격상)이라 쓰인 비와 화소, 하마비까지 둘러보면 좋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은 실물 크기의 녹로와 거중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은 실물 크기의 녹로와 거중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수원화성은 1794년 착공해 1796년에 공사가 끝났다. 약 2년 9개월의 기간이다. 장마나 무더위, 혹독한 추위를 피해 공사하지 못한 기간을 제외하면 약 2년 6개월의 짧은 시간이다. 이는 실학자 정약용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의 녹로와 거중기, 유형거는 바로 옆 팔달산 채석장에서 옮겨진 성곽 돌과 함께 보면 더 의미가 있다. 

과거 수원을 다스리며 좋은 정치를 펼친 목민관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나 선정비, 불망비라고도 불린다.

과거 수원을 다스리며 좋은 정치를 펼친 목민관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나 선정비, 불망비라고도 불린다.

마지막으로 송덕비 전시 공간에 들어섰다. 과거 수원을 다스리며 좋은 정치를 펼친 목민관을 기리는 비석이다. 선정비나 불망비라고도 불리는데, 수원 시내 곳곳에 서 있던 것을 모아 놓았다.

백성들의 존경과 감사의 표시가 담긴 송덕비는 숨겨진 이야기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 중 첫 번째 송덕비는 특별해 보인다. 받침돌에 있는 무수한 성혈 때문이다. 성혈이란 소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마음을 담아 돌을 이용해 파놓은 밥그릇 모양의 흔적이다. 고인돌과 같은 커다란 바위나 장안문 뒤편 성돌에서도 볼 수 있다. 

비의 주인공은 서유린 (1738~1802)으로 수원부 유수(1797~ 1800년)를 지냈다. 선정비 건립이 1831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봐서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듯하다. 기자는 서유린 유수의 자료를 찾아봤다. 실록과 역사서에는 정조와 신하 서유린과의 일화가 많았다. 그중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뜨기 전에 화성 유수 서유린을 불러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수원화성을 만든 특별한 목적과 정조의 꿈과 이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정조 사후 신임을 받던 서유린은 반대 정파에 의해 귀향길에 오르고 죽는다. 사후 30년이 지나 선정비가 세워졌음에도 백성들은 그를 기억하고 잊지 않았나 보다.

'서유린 유수처럼 훌륭한 아들을 낳게 해주세요','우리 아들도 과거급제하여 서유린 신하처럼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선정을 펼치게 해주세요' 성혈에 담긴 소원이 다 이루어졌을까? 궁금해졌다.

코로나 19사태가 진정되고 박물관이 열리는 날을 기다린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다시 알아보는 시간이 절실하다.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라고 쓰였는데, 1899년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정조로 격상되었다.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라고 쓰였는데, 1899년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정조로 격상되었다.

수원화성박물관, 정조태실, 거중기와 녹로, 유형거, 선정비, 이경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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