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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돈(烽墩)을 왜 광교산(光敎山)에 세우지 않았을까?
覘正祖之圖 : 정조의 의도를 엿보다
2020-06-07 12:41:45최종 업데이트 : 2020-06-08 13:54:32 작성자 : 시민기자   이강웅
화성의 봉돈은 행궁과 마주한 동성에 설치했다. 더 높은 팔달산이나 광교산이 더 나을텐데 의아하다

화성의 봉돈은 행궁(行宮)과 마주한 안산(案山)인 동성(東城)에 설치했다. 더 높은 팔달산이나 광교산(光敎山)이 나을텐데 의아하다.

화성의 시설물에서 성(城)에 접한 모든 시설물 이름에 방위명이 꼭 붙는다. 서북공심돈, 동북노대처럼 '서남(西南)'이나 '동북(東北)'같은 방위명이 모두 붙어있다. 아마 수원시민 독자 분들은 금방 "아니, 예외가 하나 있다" 하실 것이다. 맞다. 바로 '봉돈(烽墩)'이다. 유일하게 봉돈에만 방위명이 안 붙어 있다.

봉돈의 주 기능은 궁(宮)과 먼 곳의 내륙이나 해안과 정보를 소통하는 것이다. 의궤에도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라고 그 목적을 말한다.
성에 설치된 화성의 시설물 중 이름에 방위명이 안 붙은 시설물은 봉돈이 유일하다

성(城)에 설치된 화성의 시설물 중 이름에 방위명(方位名)이 안 붙은 시설물은 봉돈(烽墩)이 유일하다

화성 봉돈은 세계 모든 봉화시설물에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위치가 특이하다. 목적이 연기와 횃불에 의한 정보 소통이라면 지금 위치보다 더 높은 팔달산이나 광교산이 더 유리한데 그 보다 아주 낮은 곳에 설치했다.

둘째, 형태가 특이하다. 봉화대처럼 대(臺)의 형태가 아니고, 봉돈이란 명칭에서 보듯 돈(墩)의 제도를 합친 형태다. 외형만 보더라도 "성의 몸체 위에다 벽돌로 다시 높게 쌓은 것이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외면의 돌로 쌓은 것이 5층, 벽돌로 쌓은 것이 62층으로 전체 높이 25척, 너비 54척이다" 문(門)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이다.
화성의 봉돈은 봉수대처럼 대(臺)의 형태가 아니다. 돈(墩)의 제도를 융합한 특수한 형태로 문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화성의 봉돈은 봉화대처럼 대(臺)의 형태가 아니다. 돈(墩)의 제도를 합친 특수한 형태로 문(門)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셋째, 막강한 공격시설도 갖췄다. 현안이 2개이고, 화두 사이에 여장을 설치하고 포혈(砲穴)을 18개 설치하고, 화두 아래 2개층 벽면에도 총안(銃眼) 18개를 내었다. 화두(火竇)란 불이 나오는 길쭉한 굴뚝형태로 5개가 있다.

왜 높은 곳에 설치하지 않았을까? 왜 봉화인데도 막강한 공격력을 갖추어 놓았을까?
 
먼저 봉돈의 임무를 보자. 저녁마다 남쪽의 첫째 화두에서 횃불을 들면 동쪽 석성산 육봉(陸烽)과 서쪽 흥천대에 있는 해봉(海烽)에서 응한다. 석성산은 용인시 동백지구 뒷산이다. 그런데 흥천대 바다 봉화는 너무 멀어 중간쯤 화성부 서쪽 30리 서봉산 위에 새로이 샛 봉화(間烽)를 두어 화성 봉돈에서 오는 신호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서봉산은 화성시 정남면 문학리 뒷산이다.
왼쪽 끝이 광교산이고, 오른쪽 끝이 용인 석성산이고, 행궁 광장 앞 불탑 직선 끝이 봉돈이다. 높은 곳이 정보전달에 유리하다.

왼쪽 끝이 광교산(光敎山)이고, 오른쪽 끝이 용인 석성산이고, 행궁광장 불탑 직선 끝이 봉돈이다. 높은 곳이 정보전달에 유리하다.

이유를 살펴보자. 현대 전쟁에서도 정보의 전달과 공유가 중요하지만, 기동력이 없는 당시에는 정보의 전달은 승패의 요체다. 정보란 필요한 시기와 정확한 정보가 생명이다. 만일 필요한 시기에 정보가 전달되지 않으면 이는 곧 패배이다. 또한 오염된 정보나 거짓 정보가 전달된다면 이도 곧 패배이다. 미드웨이 해전은 역(逆)정보에 의한 정확한 정보획득이 승리의 핵심이었다.

원래 돈(墩)과 봉화대의 기능은 척후(斥候)와 정보(情報)의 전달로, 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높은 곳을 최고의 입지로 삼았다. 하지만 높은 곳일 경우 외딴 곳이 될 경우가 많고, 경계를 위한 충분한 병사와 병참을 장기간 배치하는데 불리했다.

많은 전쟁 역사에서 외딴 곳의 돈이나 봉화대가 적에게 점령당하여, 필요한 시기에 정보가 전달되지 못하고, 때론 거짓 정보를 보내는 경우를 당하였다. 이런 전쟁 역사의 교훈에서 정조는 화성에서 돈과 봉화대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꿨다.
전쟁 승패의 역사 교훈에서 정조는 돈(墩)을 공심돈(空心墩)으로, 봉화대를 봉돈(烽墩)으로 시스템 전체를 혁신하였다. 화서문과 서옹성을 지키는 서북공심돈은 적대(敵臺), 포루(砲樓), 포루(舖樓)의 역할을 모두 지녔다. 적외선 사진으로 녹색이 눈 온듯 희다.

전쟁 승패의 역사 교훈에서 정조는 돈(墩)을 공심돈(空心墩)으로, 봉화대를 봉돈(烽墩)으로 시스템 전체를 혁신하였다. 화서문과 서옹성을 지키는 서북공심돈은 적대(敵臺), 포루(砲樓), 포루(舖樓)의 역할을 모두 지녔다. 적외선 사진으로 녹색이 눈 온듯 희다.

첫째, 위치를 완전히 바꿨다. 높은 곳, 외딴 곳에 있던 봉화대를 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화성에서는 행궁의 안산(案山)이며 마주 보이는 동성(東城)에 자리 잡았다. 원성에 잇대어 성을 돌출시키고 돌출된 치(雉)에 공심돈과 봉돈을 배치했다. 의궤에도 "그래서 드디어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서 봉돈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철성(凸城)이란 성에서 돌출된 모습을 말한다.

둘째, 형태를 완전히 바꿨다. 형태는 기능을 지배한다. 돈(墩)은 공심돈(空心墩)으로, 봉화대는 봉돈(烽墩)으로 시스템 전체를 바꾼 것이다. 비꾸면서 모두 막강한 화력을 배치하여, 방어를 위한 방어가 아니라, "공격에 의한 방어" 개념으로 방어의 기조를 바꾼 것이다.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높고 외딴 곳에서 성으로 봉돈을 끌어들였다. 이젠 화성봉돈의 운명은 화성행궁과 함께 할 것이다.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높고 외딴 곳에서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화성의 봉돈은 그 형태가 봉화시설로는 세계 유일의 매스(Mass)다. 정조에게 역사(歷史)는 과거에 머무르는 역사가 아니라, 미래로 가는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대상(對象)일 뿐이다. 저 멀고 높은 곳에서 떼어와 화성에 붙여놓은 봉돈을 보며 정조(正祖)의 역사인식과 혁신 마인드를 엿보았다. 
 
서노대에 오르면 서장대와 수원 시가지를 전망할 수 있다. 어린이는 주의를 요한다.

서노대(西弩臺)에 오르면 서장대(西將臺)와 수원 시가지를 전망할 수 있다. 어린이는 오를 때 주의를 요한다.


<기사를 마무리하며, 5월 25일과 30일 게재된 "서장대를 둘러싼 성(城)은 과연 협축(夾築)일까?" 제목의 기사에 오류가 있어 정정 안내드립니다. 팔달산정의 터를 언급하며 "사방 70보 정도의 평평한 터가 필요했다" 와 "평평하게 만든 땅이 사방 70보"라 쓴 기사 내용은 잘못된 것입니다. 의궤 원문(原文)은 "山頂之拓 方七十步(산정지탁 방칠십보)"이고, 번역서에는 "산정을 다듬은 것이 사방 70보이다"입니다. 번역본의 "다듬은 것"을 보고, "다듬어 놓은 결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평평하게 만든 땅" 과 "필요한 땅"으로 보았습니다. 사방 70보는 결과물이 아니라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보축(補築)공사를 실시한 면적을 뜻합니다. 기사 게재 후 현장에 가서 확인시 발견하였습니다. 본인의 경솔한 판단에 사과드립니다.> 

 

 



 

화성, 성역의궤, 봉돈, 공심돈, 이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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