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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봉산이 어디 있나요?
수원화성 돌 뜨던 터로 추정
2020-06-12 09:16:38최종 업데이트 : 2020-06-12 07:35:26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축만제 맞은편 영광아파트 옆 주택가에 있는 앵봉산 표석과 안내문

축만제 맞은편 영광아파트 옆 주택가에 있는 앵봉산 표석과 안내문


수원화성 축성에 필요한 성돌은 숙지산, 여기산, 권동, 팔달산에서 조달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숙지산에서 캐낸 돌이 약 81,100여 덩어리, 여기산에서 캐낸 돌이 약 62,400여 덩어리, 권동에서 캐낸 돌이 약 30,200여 덩어리, 팔달산에서 캐낸 돌이 약 13,900여 덩어리로 전체 약 187,600여 덩어리라고 기록했다.

숙지산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가늘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과 같았으나 결이 조금 더 가늘었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에 비하면 더 강하고 여기산 보다는 더 거칠었다.

현재 숙지산, 여기산, 팔달산은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지명이 바뀌지 않아 정확히 어디인지 알고 있으며 그 산에 가면 곳곳에서 돌 뜨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숙지산에 돌 뜨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축만제 맞은편 영광아파트 옆 주택가에 있는 앵봉산 표석

축만제 맞은편 영광아파트 옆 주택가에 있는 앵봉산 표석



수원화성 축성 당시와 지명이 바뀐 곳이 권동(權洞)인데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근거를 가지고 위치를 추정할 수는 있다. 수원화성 축성 이후인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가 편찬한 화성지(華城誌) '방리(坊里)' 편에는 수원을 남부면, 북부면, 일용면, 형석면, 안녕면 등 40개 면에 440개 동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수원화성 주변을 남부면과 북부면으로 나눴는데 남부에 20개 동, 북부에 14개 동이 있었다.

남부에는 남창동, 남수동, 매향동, 구천동, 산루동, 교동, 하류천, 장지촌, 향목정, 독산리, 상류천, 하지장포, 상지장포, 벌리, 세동리, 권동, 천동, 내동, 우만리, 신폭 등 20개 동이 나오는데 바로 권동(權洞)이 있다. 한글 정리의궤에는 "여기산의 맞은편에 또 한 산록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권동으로 골짜기는 비록 깊지 않으나 산을 둘러싼 것이 모두 돌이다. 얼마 지난 뒤에 또 이곳을 얻으니, 이로부터 돌을 뜨는 곳이 점점 넓어졌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축만제 맞은편 영광아파트 옆 주택가에 있는 앵봉산 안내문

축만제 맞은편 영광아파트 옆 주택가에 있는 앵봉산 안내문



화성지(華城誌) '산천(山川)'에 '앵봉(鶯峯)'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건릉과 현륭원의 산릉 공역 때 석물을 이곳에서 취해 떠냈다. 나라의 명령으로 인해 본부에서 이감관을 정해 수호하고 사사로이 돌을 떠내는 것을 금 하였다. 정조 신해(정조 15, 1791)년에 봉표(封標, 나라에서 벌채를 금하는 산의 경계에 세우는 표) 하는 표석을 세웠다"라고 기록했다. 앵봉에는 수원화성 축성 이전부터 채석장이 있었던 것이다.

화성지 '제언(堤堰)' 편에 축만제는 부의 서쪽 5리 북부면에 있다고 했다. 현재 화성행궁에서 서쪽 5리 정도면 축만제 옆 철도 근처에 있는 영광아파트 주변이다. 규장각이 소장한 1872년 '수원부지도'를 보면 축만제 옆에 앵봉이 있다. 권동에 앵봉이 있고 앵봉에서 융건릉 석물과 수원화성 성돌을 뜬 것으로 추정된다.

앵봉산에서 기찻길 너머로 보이는 축만제와 서둔

앵봉산에서 기찻길 너머로 보이는 축만제와 서둔



최근에 앵봉 답사를 했는데 산의 형체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주택가로 변했다. 주택가 한쪽 철조망 안에 "앵봉산은 1789년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조성할 때 이곳에서 돌을 공급하였다. 돌의 질이 매우 뛰어나 예로부터 이름난 채석장이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다. 마을 사람들이 동제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라는 표석이 있다.

철조망 밖에는 "앵봉산(鶯峯山)은 화서1동 220번지 일대 현 영광아파트 자리에 있던 돌산으로 돌을 캐내는 장소였다... <중략> 1907년도와 1917년도 사이에 꾀꼬리 종류의 새떼가 많이 날아와 놀았다고 해서 앵봉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규장각이 소장한 1872년 수원부지도, 축만제 옆에 앵봉이 표시되어 있다.

규장각이 소장한 1872년 수원부지도, 축만제 옆에 앵봉이 표시되어 있다.



앵(鶯)자가 꾀꼬리 앵자인 것은 맞지만 말도 안 되는 설명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위 설명문의 원전을 찾아보니 놀랍게도 수원시와 수원문화원에서 발행한 '수원 지명총람' 화서1동 편에 있었다. 수원시 팔달구 홈페이지 화서1동 행정복지센터 유래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분명히 1831년에 편찬한 화성지와 1872년 지도에도 앵봉(鶯峯)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상상력으로 쓴 것 같아 안타깝다.

무지에 의한 오류는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은 철저히 사실에 근거해 신중하게 써야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아니면 말고' 식으로 써서는 절대 안 되고 반드시 책임을 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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