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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어머니 무덤돌을 다리 공사에 사용한 왕도 있었네
태종 이방원과 청계천 이야기
2017-09-15 18:18:50최종 업데이트 : 2017-09-15 15:21:29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청계천이 없다고 가정해 보라. 빌딩 숲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삭막함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청계천이 있기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삶에서 여유를 즐긴다. 속도를 자랑하는 자동차 소리를 잠시 잊고, 천에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연다. 여유를 누린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다. 사람들은 청계천에서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만나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기회를 누린다.


청계천은 우리 문화재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 늘 있기 때문에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다. 청계천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안다면 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청계천의 시작은 조선 시대 한양 천도 후부터 시작한다. 태종실록 20권, 태종 10년 8월 8일 자에 보면,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광통교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를 만드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기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초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두 명의 부인이 있다. 한 씨 부인과 강 씨 부인이다. 한 씨 부인(신의왕후)은 이방과(정종)과 이방원(태종) 등 6남 2녀 낳았다. 하지만 한 씨는 조선의 건국을 보지 못했다. 반면 강 씨 부인(신덕왕후)은 개성 명문가 집안의 딸로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조를 했다. 결국 조선의 첫 왕비의 자리에도 오른다. 그리고 그녀는 당시 11살이던 이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내조를 했다.

청계천 광통교에 다리 이야기. 태종이 흙 다리를 석교로 만든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를 본 한 씨 부인의 왕자들은 불만에 찼다. 전장에 나가서 피를 흘려보지도 않은 어린 이복동생이 세자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다섯째였던 이방원은 불만이 가장 컸다. 급기야 칼을 휘둘러 왕권을 차지한다.


이후 신덕왕후 강 씨가 세상을 떠난다. 태조 이성계는 슬픔이 극에 달해, 경복궁 가까이에 있는 언덕(현재 영국 대사관)에 왕후의 능을 조성한다. 조선의 법을 어기고, 도성에 능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내가 죽거든 왕후(신덕왕후) 옆에 합장해 주어라'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태종은 아버지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강 씨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예견된 일이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무덤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마련했다. 그리고 정동에 있었던 정릉(신덕왕후의 무덤)을 도성 밖으로 이장했다. 정릉은 전보다 무덤 규모가 작아졌고, 무덤도 능에서 묘로 격하되었다. 실록의 기록에서 보듯이, 이 과정에서 정릉의 병풍석들이 광통교 공사에 사용되었다.


광통교는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건설 당시에는 흙으로 놓았으나. 태종이 석교로 만들었다. 조선의 500년 역사와 함께 한 광통교는 1900년대에 오면서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로 몸살을 앓는다. 1899년 서울에 전차 길이 생기면서, 나뒹굴게 되었다. 그리고 정비를 이유로 복개가 계속되면서, 광통교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그리고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청계천은 색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복원된 청계천은 과거와 달리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물을 퍼 올려 흐르게 했다.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과거의 모습대로 복구했다.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옛 모습 그대로 살렸다. 광통교에 놓여진 석물을 그대로 이용해 다리를 복원했다. 광통교에 있는 돌들은 그냥 돌이 아니라 왕의 능을 둘러쌌던 병풍석이다.


그 중에 광통교는 역사 이야기가 그대로 있어 볼만한다. 1958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 때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 창덕궁 등으로 이전하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다시 묻혔다. 이것을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옛 모습 그대로 살렸다. 광통교에 놓여진 석물을 그대로 이용해 다리를 복원했다. 광통교에 있는 돌들은 그냥 돌이 아니라 왕의 능을 둘러쌌던 병풍석이다. 복원 공사 시작 때 새로 쌓은 돌들과 함께 있는 병풍석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함께 있는 장면이다.

 

병풍석은 흔한 무덤돌이 아니라, 장인의 솜씨가 살아 있는 예술품이다. 남쪽에 있는 조선왕릉 40기 중 능침 공간이 개방된 곳은 몇 군데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병풍석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곳 광통교에 있는 병풍석은 가까이 볼 수 있고, 손으로도 만질 수 있다. 태종이 의붓어머니 강 씨 부인을 미워했고. 그래서 무덤의 돌조차 다리 공사에 썼다는 역사의 이야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청계천 복원 공사는 옛 모습으로 그대로 한 것은 아니지만, 도심 한 가운데 풍경을 새롭게 그리고 정겹게 한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역사의 이야기까지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옥에 티라면, 복원 공사를 하면서, 청계천의 옛 이름 '개천'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쉽다. 하루 빨리 제 이름을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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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청계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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