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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복원정화기념비와 화성기적비
장안공원에 있는 수원화성 축성과 복원의 상징물
2020-02-11 08:12:45최종 업데이트 : 2020-02-15 10:49:57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장안문과 북서포루 사이 성벽,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든 성벽이다.

수원화성 장안문과 북서포루 사이 성벽,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든 성벽이다.

수원화성 북서포루 밖 장안공원에는 '화성복원정화기념비'와 '화성기적비'가 나란히 서있다. 화성복원정화기념비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수원화성을 복원하고 1979년 9월에 세운 것이다. 화성기적비는 1991년 11월에 세웠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한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 글자체로 새겼다. 이 비들이 현대에 세워졌다고는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데 하나는 현대에 누군가에 의해 글씨가 훼손되었고 하나는 그 내력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쉽다.

화성복원정화기념비는 화성장대 옆에 있는 서노대 형태로 만들어 좌우 측면에는 화성 축성 장비인 거중기 등을 새겼고 전면 제자인 '화성복원정화기념비'는 박정희 글씨로 새겼다. 후면에는 최영희가 지은 비문을 서예가 김응현이 썼다. "나라가 중흥할 때는 옛 일을 보살피며 새로운 것을 만든다. 조선왕조 정조 때에 화성을 새로 쌓은 일도 그러하였고 오늘날 이 성을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일도 그러한 것이다. 화성은 성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갖추었으며 그 아름다움이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라 일컬어진다"로 시작한다.

화성복원정화기념비, '수원성'을 '화성'으로 다시 새기면서 회칠을 해놓았다.

화성복원정화기념비, '수원성'을 '화성'으로 다시 새기면서 회칠을 해놓았다.

이 비가 처음 세워질 때는 전면 제자가 '수원성복원정화기념비'였다. 그 당시에는 수원화성을 수원성이라 부르던 시기였다. '화성'을 수원성이라 부르는 것이 일제의 잔재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언제인가 '수원성'이란 글자에 회칠을 하고 '화성'이라고 다시 새겼다. 후면의 비문에도 무려 8곳에 회칠을 해 다시 새겼다. 검정색 바탕에 흰색으로 회칠을 했으니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었다. '수원성'도 역사이거늘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천박한 행위가 개탄스러울 뿐이다.

정조대왕은 수원에 신도시를 세우고 1793년에 수원이란 명칭을 화성으로 바꾸고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1794년부터 화성을 건설했다. 이 성의 공식 명칭은 화성(華城)이다.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바꿨다고 수원의 백성들 모두가 수원을 화성이라고 부르지는 않은 것 같다.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홍재전서, 일성록, 화성성역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등 당대의 기록에도 화성유수와 수원유수, 화성과 수원을 혼용해 사용했다.

화성복원정화기념비 뒷면, '수원성'을 '화성'으로 다시 새기면서 무려 8곳이나 회칠을 해놓았다.

화성복원정화기념비 뒷면, '수원성'을 '화성'으로 다시 새기면서 무려 8곳이나 회칠을 해놓았다.

 
화성을 수원성으로, 장안문을 북문, 팔달문을 남문, 화서문을 서문, 창룡문을 동문이라 기록하기도 하고 부르기도 했다. 만석거를 북쪽에 있는 호수라 하여 북지, 축만제를 서쪽에 있는 호수라 하여 서호라 불렀다. 수원8경인 북지상련, 서호낙조라는 명칭은 100년 이상 사용했다. 공식 명칭을 방향에 따라 쉽게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것이라 할 수도 없다.

화성기적비의 정체

화성기적비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비석을 만드는 과정은 비문과 비석에 새길 글씨가 있으면 비석에 새겨서 세우기만 하면 된다. 정조대왕의 명으로 김종수가 비문을 지었고 비석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비문의 글씨를 누가 썼다는 기록은 없지만 비문을 비석에 새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장안문 등 수원화성 건축물의 상량문 경우에도 상량문 글을 짓고 글씨를 직접 쓴 경우도 있지만 글만 지었다는 기록이 더 많다.

1991년 11월에 세운 화성기적비, 비석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한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 글자체로 새겼다.

1991년 11월에 세운 화성기적비, 비석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한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 글자체로 새겼다.


화성성역의궤 권1 연설(筵設,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자문하고 대답하는 자리에서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말) 1796년 9월 10일자 기록에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하교하여 말씀하시기를 "옛날 사람들은 하나의 작은 다리를 건립하였어도 오히려 돌에 새겨서 그 일을 기록하였다. 하물며 이번 성역은 일이 크고 공역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소중함이 자별하니 공적을 기록하는 처사가 있어야 하겠다" 하였다. 조심태는 "이 일은 이미 돌을 다듬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정조대왕은 "그러면 속히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봉조하 김종수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올리게 했다. 김종수는 1797년 1월에 '화성기적비' 비문을 지어서 올렸다.

1991년 11월에 세운 화성기적비, 비석 상단의 화성기적비명은 전서체, 내용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한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 글자체로 새겼다.

1991년 11월에 세운 화성기적비, 비석 상단의 화성기적비명은 전서체, 내용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한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 글자체로 새겼다.


장안공원에 있는 '화성기적비' 설명문에는 "화성기적비는 성역의 주역들이 바뀌면서 곧바로 세워지지 못하였다. 지금 비석은 1991년 11월 수원시에서 제작하여 장안공원에 건립한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지엄한 왕명이 있었음에도 무엄하게도 비를 세우지 못했다는 설명에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수원화성 축성의 주역인 화성유수 조심태는 1794년 2월 26일부터 1797년 7월까지 화성유수를 역임했다. 조심태에 이어 화서문 상량문을 짓고 쓴 서유린이 1797년 7월부터 1800년 11월까지 화성유수를 역임했다. 정조대왕은 1800년 6월 28일에 승하했다.

화성기적비 후면, 정조의 승하로 화성기적비 건립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1년 11월에 수원시장이 건립했다고 기록했다.

화성기적비 후면, 정조의 승하로 화성기적비 건립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1년 11월에 수원시장이 건립했다고 기록했다.


1797년 1월에 화성기적비 비문을 지은 이후 1800년 6월 정조대왕이 승하하기 까지는 만 3년 이상의 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 중에 정조대왕은 수원을 5번이나 방문했다. 1798년에는 원행을묘정리의궤가 출판되었고 화성성역의궤는 편찬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비석을 중요시여긴 정조대왕의 성품으로 봤을 때 이 기간에 기록과 비의 실체가 없다고 비석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비석 1좌, 예비 비석 1좌를 재고로 남겼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 비석이 화성기적비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정조대왕은 지지대고개부터 현륭원까지 왕의 행차로인 필로에 이정표로 그곳 지명을 새긴 비석을 세우게 했다. 화성성역의궤와 1831년 편찬한 화성지 기록에는 표석을 세운 곳이 20곳이나 된다. 지지대 등의 주필대도 3곳이나 만들었다. 어딘가에 화성기적비가 서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비석의 정체가 궁금하다.

화성복원정화기념비, 화성기적비, 장안공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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