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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 시 현판 복원에 관하여
정조대왕 시를 채제공이 썼다
2020-05-27 06:58:17최종 업데이트 : 2020-05-27 10:47:40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정조대왕은 1797년 1월 29일부터 2월 1일까지 2박 3일 동안 수원을 방문했다. 1796년 9월에 완공한 수원화성 전체를 처음으로 순행하게 된 것이다. 특히나 10월 16일 수원화성 낙성연에 참석하려던 것이 무산된 후의 방문이었기 때문에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1월 29일 출궁해 화성행궁에 도착한 후 곧바로 수원화성 순행에 나섰다.

화성행궁을 나서 화양루, 화성장대, 화서문, 서북공심돈 앞에 이르러 "공심돈의 제도는 곧 우리 동방의 성 제도에서 처음으로 있는 것이다. 층층다리가 구불구불하여 어가가 오르기에 마땅치 않으니 여러 신하 중에 보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보게 하라"고 한 후 장안문, 화홍문을 지나 방화수류정에 도착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용연, 풍광이 수려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용연, 풍광이 수려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방화수류정 섬돌에서 활쏘기를 한 후 신하들도 활쏘기를 했다. 구경하는 사람 중에 열 명에게 활 쏠 기회를 주었다. 이후 어제시를 내리고 신하들에게 갱진하라고 했다. 갱진이란 임금이 지은 글에 화답하여 글을 지어 바치는 것을 말한다. 정조대왕은 가는 곳마다 시를 지었고, 그때마다 신하들에게 갱진시를 짓게 했다. 문장이 짧은 신하들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역편춘성일미사(歷遍春城日未斜) / 춘성을 두루 보고도 해가 아직 기울지 않고
소정운물전청가(小亭雲物轉晴佳) / 소정의 풍경은 한결 더 맑고 아름답구나.
난기관보삼연묘(鑾旂慣報參連妙) / 난기가 계속 연이어 세 번 맞춤을 알리니
만류음중족사화(萬柳陰中簇似花) / 수많은 버들 그늘 속에 살촉이 꽃 같구나.

용연에서 바라본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용연 주변은 젊은 연인들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용연에서 바라본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용연 주변은 젊은 연인들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일성록, 홍재전서, 한글 정리의궤에 정조대왕의 시가 나온다. 일성록과 홍재전서에는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지만 한글 정리의궤는 당시의 한글로 쓰였기 때문에 18세기의 언어와 한시 번역의 미묘한 차이도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한글 정리의궤의 시를 옮겼다.

1월 30일 현륭원을 다녀와 화성행궁 유여택에서 "어제 지은 어제(御製, 정조대왕이 방화수류정에서 지은 시)를 좌상이 써서 들이고 새겨서 현판하게 하라"라고 명했다. 이때 좌의정은 채제공이었다. 이런 내용은 정조실록, 홍재전서, 일성록 등에는 없는데 한글 정리의궤에 유일하게 기록이 있다. 방화수류정에 정조대왕의 어제시가 채제공 글씨로 시(詩) 현판이 걸렸던 것이다.

수원화성 화성장대에 걸린 정조대왕 시 현판

수원화성 화성장대에 걸린 정조대왕 시 현판

지금까지 방화수류정에는 시 현판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전국의 유명한 정자에는 시 현판이 줄줄이 달려있다. 당대의 문장가, 서예가 등의 글씨를 볼 수 있어 정자의 품격을 더해준다. 방화수류정은 성곽 시설이지만 풍광이 뛰어난 정자인데 시 현판 하나 없어 아쉬웠다.

기록을 바탕으로 방화수류정에 시 현판을 달았으면 좋겠다. 채제공의 글씨는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집자를 해도 충분하다. 방화수류정에 시 현판이 걸리면 대단히 운치가 있을 것이다. 방화수류정 현판은 조윤형이 썼다. 1930년대의 사진을 보면 조윤형이 해서체로 쓴 글씨를 볼 수 있고 복원이 가능하다. 현재의 현판글씨는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조윤형의 글씨로 바꿨으면 좋겠다.

1797년 1월 29일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정조대왕이 쓴 시, 이 사진은 기자가 정조대왕 시를 초서로 쓴 것이다.

1797년 1월 29일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정조대왕이 쓴 시, 이 사진은 기자가 정조대왕 시를 초서로 쓴 것이다.

최근에 화성장대에 정조대왕의 시 현판을 복원해 걸었다. 이 시는 1795년 윤2월 12일 화성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지휘한 후 쓴 것이다. 일성록 기록에는 이만수에게 명해 어제시를 써서 내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 현판 원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었기 때문에 복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화성장대에 시 현판이 걸리자 분위기가 확 변했다. 화성장대라는 정조대왕의 호방한 현판글씨와 시를 볼 수 있어 장쾌한 경관 뿐 아니라 운치를 더한다. 건물에 시 현판이 있고 없고는 엄청난 품격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고지식한 틀에 얽매이지 말고 열린 자세로 문화재를 바라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정조대왕 시, 세계유산, 시 현판,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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