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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4대문 명칭은 선문일까? 홍예문일까?
한글 정리의궤에 답이 있다
2020-07-30 11:12:49최종 업데이트 : 2020-07-30 11:12:46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화서문 안쪽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3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수원화성 화서문 안쪽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3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 권5 재용(財用, 화성 성역에 투입된 비용과 물자, 실제 공사에서 소비된 자재의 양을 정밀하게 기록) 편에는 수원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대선단석(大扇單石) 33덩이(각 길이 5척 2촌, 너비 4척 1촌, 높이 4척, 한 덩이 값이 15냥), 중선단석 12덩이(각 길이 5척 2촌, 너비 3척 9촌, 높이 3척 8촌, 한 덩이 값이 13냥), 소선단석 108덩이(각 길이 4척, 너비 2척, 높이 2척 3촌, 한 덩이 값이 7냥). 대홍예석(大虹蜺石) 104덩이(각 길이 5척 2촌, 너비 2척, 높이 2척 7촌, 한 덩이 값이 12냥), 소홍예석 394덩이(각 길이 3척, 너비 1척 7촌, 높이 1척 9촌, 한 덩이 값이 6냥).

수원화성 화서문 밖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1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수원화성 화서문 밖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1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대선단석은 4대문에만 사용했는데 홍예 하단부 앞뒤에 각각 4개씩 총 8개를 사용했다. 33덩이 중 32덩이를 사용하고 1덩이는 재고로 남겼다. 중선단석은 장안문과 팔달문에서 대선단석 위에 1개씩 사용해 총 8개를 사용했다. 12덩이 중 8덩이를 사용하고 4덩이를 재고로 남겼다.

대홍예석은 장안문과 팔달문에 각각 26덩이, 창룡문과 화서문에 각각 24덩이를 사용하고 4덩이를 재고로 남겼다. 소홍예석은 북옹성에 40덩이, 남암문에 26덩이, 화홍문에 126덩이, 남수문에 198덩이를 사용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는 돌은 뜬 개수와 사용한 개수, 재고로 남긴 개수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수원화성 장안문 안쪽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 1단으로 중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3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수원화성 장안문 안쪽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 1단으로 중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3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수원화성 장안문 밖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 1단으로 중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3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수원화성 장안문 밖 홍예, 문 좌우에 2단으로 대선단석, 1단으로 중선단석을 쌓고 그 위에 홍예석 13개로 홍예문을 만들었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도량형(길이의 단위)은 영조척, 주척, 포백척, 보, 리를 사용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과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수원화성 건축물 및 돌을 실측한 값을 수학적 통계를 바탕으로 환산하면 1영조척은 30.85cm, 1주척은 19.54cm, 1포백척은 37.15cm, 1보는 117.23cm, 1리는 422.03m 이다. 직육면체인 대선단석의 크기는 길이 160.42cm, 너비 126.49cm, 높이 123.4cm 이다. 수원화성 축성에 사용한 돌 중 가장 큰 돌이 선단석이며 무게는 약 6.5톤이다.

수원화성 4대문은 홍예로 만들어졌다. 홍예 안쪽에 대문을 달았는데 선문이라고 한다. 화성성역의궤의 장안문 편을 보면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있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수원화성 화홍문 안쪽 홍예, 선단석 위로 홍예석 9개로 홍예를 만들었다.

수원화성 화홍문 안쪽 홍예, 선단석 위로 홍예석 9개로 홍예를 만들었다.


수원화성 전문가들 중에는 화성성역의궤 원문에는 홍예와 선문이라는 용어만 나오는데 번역은 '홍예를 홍예문으로 잘못 번역했고 홍예부분과 그 밑을 받쳐주는 선단석을 합쳐서 선문이라 했고 홍예문은 선문으로 불러야 맞다'는 지적을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화성성역의궤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한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오해한 것이다. 또한 한글 정리의궤를 공부하지 않아 수원화성 축성 당시 한글의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수원화성 화홍문 밖 홍예, 선단석 위로 홍예석 9개로 홍예를 만들었다.

수원화성 화홍문 밖 홍예, 선단석 위로 홍예석 9개로 홍예를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있지만 '한글 정리의궤'는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한글로 쓴 것이다. 화성성역의궤 한문 원본과 화성성역의궤를 한글로 번역한 번역본과 한글 정리의궤를 비교해보면 화성성역의궤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문(扇門)의 '선'자는 회의문자로 부채, 문짝이라는 의미이다. 문짝의 뜻인 지게호(戶, 지게문)部와 날개의 뜻인 羽(우)로 이루어져, 문짝이 문의 양쪽에 있어 새의 날개처럼 열림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선단석(扇單石)이란 홍예(虹蜺)문 등의 맨 밑을 괴는 크고 모난 돌이며 홍예(虹蜺)란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이다.

'한글 정리의궤'에서 홍예와 선문을 당시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자.

"창룡문의 역사를 마쳤다. 홍예 사이의 두 짝 문은 쇠 장식을 입히고 긴 빗장을 지르는 것이 남북문의 제도와 같다"
"남공심돈을 만드니, 아래층 안쪽 면에 홍예로 작은 문을 내어 위아래가 잠기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을 완성하였다. 아래층의 작은 홍예문 또한 남공심돈과 같았다"
"남수문의 역사를 마쳤다. 또 작은 홍예문을 마주 내어 동서쪽 원성의 내탁으로 통하는 길이 되도록 하였다"
"동암문의 홍예가 이날 또 완성되었다. 두 짝 문을 철엽으로 싸고 긴 빗장을 두어 아래위로 닫아두었다"
"봉돈을 완성하였으니, 한 가운데에 작은 홍예식 문을 설치하니"
"동북공심돈을 완성하니, 바깥 벽축 동쪽에 홍예로 작은 문을 내어 그 속을 통하게 하며"

라 쓰고 있다.

수원화성 남수문 밖 홍예, 선단석 위로 홍예석 9개로 홍예를 만들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홍예석 11개로 홍예를 만들었다.

수원화성 남수문 밖 홍예, 선단석 위로 홍예석 9개로 홍예를 만들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홍예석 11개로 홍예를 만들었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의 우리말을 한문으로 번역했다가 현대에 와서 한글로 번역한 번역본과 당시의 우리말을 그대로 쓴 것 중 어떤 표현이 더 우리말로 정확할까? 위 글에서 보듯이 '두 짝 문'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선문'이며 '홍예문'이란 표현도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화성성역의궤를 새로 번역해야 한다. 한글 정리의궤를 거울삼아 잘못 번역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한다. 수원을 대표하는 것이 수원화성이고 수원화성 축성 보고서가 화성성역의궤이며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이제 제대로 된 화성성역의궤 번역본이 나와야 한다. 수원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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