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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문 현판글씨는 누가 썼을까요
195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
2020-10-16 13:39:26최종 업데이트 : 2020-10-16 16:10:26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화서문에 걸려있는 현판, 195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수원화성 화서문에 걸려있는 현판, 195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수원화성 시설물에는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화성장대, 연무대, 화양루 등 9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에 걸린 것도 있고 이후에 건 것도 있다. 지난봄에 현판을 보수하고 원형으로 정비했다. 현판의 색상을 흰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로 바꾸고 테두리 단청 문양을 복원했다.

화성사업소에서는 현판을 보수하고 정비하면서 팔달문, 화홍문, 화서문 현판의 나무 종류와 연대분석 작업을 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산학협력단 목제문화재연구소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팔달문과 화홍문 알판은 잣나무류, 화서문 알판은 은행나무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채제공이 쓴 현판글씨, 사미정 / 사진 인터넷 캡처

채제공이 쓴 현판글씨, 사미정 / 사진 인터넷 캡처


알판에 대한 연대 분석결과 팔달문 현판은 1765년 직후 벌채된 잣나무를 이용해 제작된 것이고, 화홍문 현판은 1755년 이후에 벌채된 잣나무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했다. 팔달문은 조윤형, 화홍문은 유한지의 글씨로 당대에 만든 현판으로 확인된 것이다. 화서문 현판은 그동안 수원화성 축성 책임자였던 채제공의 글씨로 알려져 있었지만 분석결과 195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채제공 글씨를 다시 새긴 것인지 다른 사람이 새로 글씨를 쓴 것인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수원화성 서쪽 대문인 화서문은 축성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1964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축성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 수원부계록에 1846년 홍수 피해를 입어 1848년에 보수한 기록이 나오고, 1932년 화서문 수리에 대한 신문기사 기록과 1964년에도 보수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7년 헤르만산더가 찍은 화서문 사진 /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07년 헤르만산더가 찍은 화서문 사진 /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화서문 현판이 언제 교체되었는지 채제공 서체, 기록과 사진을 비교 검토했다. 화서문(華西門) 현판글씨는 정자체로 쓴 해서체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채제공의 글씨체를 모두 분석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가 있기 때문에 같은 글자를 찾으면 어느 정도 비교할 수 있다. 사진을 통해서는 건물 외형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연대를 추정했다.

1907 헤르만 산더가 찍은 것이 최초의 화서문 사진이다. 화서문 현판 오른쪽이 떨어져 약 15도 기울어졌고 누각은 양호해 보인다. 문루의 여장은 일부만 무너졌고 옹성은 완전해 보인다. 글씨는 검정색으로 되어 있다.

1907년 헤르만산더가 찍은 화서문 사진, 현판 한쪽이 떨어졌지만 흰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 화자와 서자의 간격이 현재 글씨와 다르다. /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07년 헤르만산더가 찍은 화서문 사진, 현판 한쪽이 떨어졌지만 흰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 화자와 서자의 간격이 현재 글씨와 다르다. /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31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화서문 사진을 보면 현판 글씨는 안보이지만 제대로 걸려있고 문루의 여장은 이전보다 더 많이 무너져 내렸다. 1930년 영국인 트라우츠가 펴낸 책 속의 화서문 사진은 앞의 사진보다 누각과 여장이 더 많이 무너졌는데 시기상으로 보면 1930년 이전에 이미 화서문은 문루의 여장은 대부분 무너졌고 현판도 보일 듯 말듯하다.

1953년 8월 24일 미군인 로버트 리 월워쓰가 찍은 사진에는 화서문 누각은 수리를 했지만 누각 안 여장과 옹성은 수리하지 않았다. 칼라사진 속에 현판이 안 보이는데 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8월 24일 미군 병사 로버트 리 월워쓰가 찍은 화서문 사진, 현판이 없다. / 사진 수원박물관

1953년 8월 24일 미군 병사 로버트 리 월워쓰가 찍은 화서문 사진, 현판이 없다. / 사진 수원박물관



수원박물관이 소장한 1960년 전후의 사진에는 현판이 보이고 글씨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흰색 글씨로 추정된다. 1961년 조선일보에 실린 화서문 사진에는 흰색글씨의 화서문 글씨가 선명하고 현재의 글씨와 같다. 1967년 미군인 게리 헬쎈이 찍은 사진은 누각, 여장, 옹성이 말끔하게 수리된 상태이고, 현판글씨는 흰색이다.

연대가 정확한 기존의 모든 사진을 분석한 결과 화서문 현판은 1930년대가 지나면서 훼손되어 1950년대까지 화서문에는 현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검정색 바탕에 흰색글씨로 현판을 새로 제작해 단 것으로 추정된다.

1961년 조선일보에 실린 화서문 사진, 현재 현판과 같은 것이며 검정색 바탕에 흰색 글씨이다. / 사진 조선일보 캡처

1961년 조선일보에 실린 화서문 사진, 현재 현판과 같은 것이며 검정색 바탕에 흰색 글씨이다. / 사진 조선일보 캡처


헤르만 산더 사진 속 글씨는 '서(西)'자의 첫 획인 일(一)자가 옆 글자인 화(華)자, 문(門)자와 윗선이 맞춰져있다. 또한 일(一)과 구(口)의 간격이 충분해 보여 현재의 '화서문' 현판글씨와는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옛 글씨는 화자와 서자의 간격이 충분한데 현재 글씨는 화자와 서자가 거의 붙어 있어 차이가 확연히 보인다.

채제공 글씨 중 화(華)자, 문(門)자는 찾을 수 없고 서(西)자는 몇 개 찾아서 비교해본 결과 현재의 글씨는 채제공 글씨와는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화서문 현판의 서(西)자는 글자 간격이 좁고 납작하게 써서 답답한 느낌이다. 


채제공이 쓴 용주사 상량문 글씨에서 서(西)자 비교 / 사진 수원화성박물관 자료 캡처

채제공이 쓴 용주사 상량문 글씨에서 서(西)자 비교 / 사진 수원화성박물관 자료 캡처



현재 화서문 현판글씨를 감정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서예가인 양택동 서예박물관장은 "화서문 글씨는 옛 글씨가 아니다. 현판글씨로 어울리지도 않고 서예를 제대로 익힌 사람의 글씨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글씨의 형태로 봤을 때 1961년 사진부터 글씨가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채제공의 글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지만 누가 쓴 것인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1950년 전후에 찍은 사진이나 현판에 대한 기록이 나와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화서문 현판, 화성사업소, 채제공,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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