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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체험으로 '1.3세대'가 미래를 이어간다
사)대한노인회 팔달구지회 충효교실, '서대문 형무소역사관' 체험
2019-08-10 18:02:30최종 업데이트 : 2019-08-11 13:29:43 작성자 : 시민기자   김청극
"유관순 누나가 감옥에 있었던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화홍초 2학년에 재학 중인 박민우군은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는데 붙잡혀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김민기(세류초 6년)군은 어른스럽게 말했다.
 
충효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팔달구 지회(지회장 이병학)는 9일 초등학생 20여 명을 인솔하여 역사가 숨 쉬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다녀왔다. 근현대 우리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상징하였던 서대문형무소가 보존•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의 현장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방학을 맞이하여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역사관을 찾고있다.

방학을 맞이하여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역사관을 찾고있다.

찌는 듯한 본격적인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역사관 입구에 다다르자 방학을 맞이하여 유치원생을 비롯하여 많은 초등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역사관 안으로 들어서니 흠뻑 젖은 땀이 시원함으로 변했다. 우리 충효교실에 참여하고 있는 20여명의 어린이들은 인솔자와 함께 민현옥 해설자의 인도로 전시관 1층에 있는 정보검색실과 역사실, 영상실에서 '역사관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다소 호기심에 찬 어린이들은 눈동자도 또렷하게 해설사의 말에 집중했다. 1908년 10월 21일에 일본사람에 의해 '경성감옥 개소'를 시작으로 서대문 감옥,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1987년 서울구치소로 변경하였다가 1923년 5월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변경했다. 이러한 절차로 1998년 11월 5일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개관되었다.
1908년~1987년까지 서대문형무소의 80년 역사의 의미를 살피고 있다.

1908년~1987년까지 서대문형무소의 80년 역사의 의미를 살피고 있다.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해설자가 설명할 때는 인솔자를 비롯하여 어린이들은 더욱 집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 즉 고종명성황후 시해, 1904년의 러일전쟁, 1905년 11월 17일은 을사늑약(강제로 맺은 조약이기에 늑약이라 한다) 1910년 강제병합으로 역사의 불행이 본격화됐다.
취조하며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처박는 물고문 현장

취조하며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처박는 물고문 현장

전시관 2층으로 가니 민족 저항실 1, 2, 3이 있어 산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민족저항실1은 대한제국말기부터 1919년까지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실상을 전시해놓았다. 독립운동가의 수감 자료인 '수행기록표'를 모두가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추모의 공간이었다. 사형장과 지하시신 수습실 모형은 끔찍함을 느끼게 했다.

지하 전시관의 고문실을 보며 치가 떨려옴을 느꼈다. 독립운동가 취조과정에서 자행되었던 고문의 실상, 옥중증언을 통해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볼 수 있었다.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처 박았던 물고문 현장, 가장 악랄한 손톱 자르기 고문 현장, 기록으로 보는 옥중생활 1, 2는 그들의 악랄함이 어디까지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참석한 어린이들 대부분이 저학년이 많아 집중이 안 돼 인솔자들은 걱정과 함께 아쉬움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지금은 잘 모르는 것 같아도 후일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 체험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기회가 있을 겁니라"라고 행궁동 한부웅 경로당 회장은 말했다.
5천장의 독립운동가들의 수감 자료인 수행기록표

5천장의 독립운동가들의 수감 자료인 수행기록표

주의가 산만해져도 해설자는 해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와 감옥을 연관지어 설명했다. "잘 아는 남자 독립운동가를 말해 보라"고 했다. 이봉창, 윤봉길, 안중근 그 다음은 대부분 잘 몰랐다. 강우규 의사(1855~1920)를 설명했다. 의사의 뜻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채경옥의사, 송학선의사, 이재명의사(1890~1910) 등 설명이 이어졌다. 남 옥사(獄舍)와 여 옥사를 살폈다. 여 옥사는 1918년에 설치했는데 철거한 후 2009년 원형을 복원했다. 너무도 좁고 답답한 고독의 방, 이렇게 독립투사들은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희생했다. 12옥사는 3칸의 독방으로 암호통신인 '타벽 통보법', '감옥 내 독립만세운동'을 재현 전시하고 있었다. 11옥사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감방 안에 들어가 수감생활을 체감할 수 있었다.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순사에게 잡혀가는 애국 학생들 재현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순사에게 잡혀가는 애국학생들 재현

생활공간 감방, 식사, 틀밥(가다밥) 수인복, 재판받으러 갈 때 누군지 모르게,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게 머리에 쓰고 가는 '용수'도 보았다. '1919년 5월29일 매일신문에는 3.1운동으로 서대문감옥에 수감자 26일 2470인이다'라고 기사화 했다.

시간이 모자라 약 1시간 30분 동안 지루함도 잊은 채 현장을 본 후 밖으로 나오니 더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독립만세 체험을 빼놓을 수 없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많은 관람객이 모여 들었다. 고등학생 몇몇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일본순사가 다가와 붙잡아가는 광경을 목격하며 참석한 관람객은 하나가 되었다.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 매우 실감있는 장면이었다.
성시연(세류초 3년)어린이는 "역사를 알게 되어 좋았고 독립 운동가들이 처참하게 죽어 기분이 안 좋았다"고 말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입구와 태형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8월15일 광복절을 앞두고 대형태극기가 남다르게 느껴오는 진한 감동도 있었다. 최근 경제문제로 일본으로부터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며 방학을 이용하여 역사관을 방문해보는 것은 더없는 의미있는 현장학습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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