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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가는 친구와 소주 한잔 하면서
40대 가장들이 늘어 놓은 푸념과 하소연과 넋두리들
2012-12-31 14:02:25최종 업데이트 : 2012-12-31 14:02:25 작성자 : 시민기자   남민배

"뭐... 인연 닿으면 또 보겠지. 잘들 지내라." 
친구는 차분했다. 친구를 떠나 보내는 슬픔에 겨워 눈시울을 적시는 놈도 있었고, 아직 떠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다시 결정하는건 어떻겠냐는 읍소를 하는 놈도 있었지만, 녀석의 표정은 오히려 더 결연했다.

티끌 만큼의 주저와 망설임도 남기지 않으려 수개월동안 고민했던 친구였다. 친구는 호주로 이민을 결정했다. 그리고 떠나기에 앞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 겸 소주 한잔 하자고 만난 자리에서 녀석은 단 한번도 떠남에 대한 아쉬움이나 재고의 여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길게 늘어뜨려 쉬는 한숨소리 속에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를 자주 볼수 없다는 아쉬움만 배어나왔다. 아니 이대로 떠나면 정말 죽을때까지 영영 보지 못할수도 있으니까.

"잘난 인터넷 있지 않냐. 요즘 카카오톡도 좋더구만. 심심하면 문자 날려라. 우린 IT강대국 아니냐"
그 말속에 뼈가 있었다. 우린 IT강대국 아니냔 말. 겉으로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 강대국에 OECD국가에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하고 동계올림픽까지 개최하는 선진국이라지만 국민은 이민을 떠나야 하는 나라라는 뒤틀린 심사였다.

이 친구는 20여년 동안 경기도 안산에서 금형을 하면서 한길을 걸어 왔다. 80년대 말부터 다른 일 안하고 오로지 그것만 했고 그걸로 자수성가 했고 직원들도 많이 고용하면서 중소기업 사장으로써 국가경제에도 이바지 했다.
그러나 최근 3~4년전부터 부쩍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중소기업 분야를 대기업이 진출해서 어려워졌고, 값싼 중국산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FTA로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매출은 자꾸만 떨어지는데 종업원 20명의 복지는 고사하고 월급이 자꾸만 밀리면서 담보로 잡혀있던 회사 부지가 경매로 사라지고, 작년 여름에는 그동안 살고 있던 집마저 팔렸다.
그나마 부동산 경기가 안좋아 제값도 못 받은채 헐값에 넘어갔다.
제때 안나오는 월급에 하루하루 직원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조업차질과 제품의 납기지연이 잦아지고, 하자로 신용저하와 경쟁력마저 잃었다. 그동안 20년 가까이 쌓아왔던 신뢰가 슬슬 허물어지면서 상실감이 밀려왔다.

평소에는 친구들을 만날때마다 사장이라며 어렵게 사는 친구들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모교에도 장학금까지 내던 늘 호탕하게 웃던 녀석이었는데 친구들 모임에조차 나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작년 말, 일감이 줄어 더 이상 버텨내기가 어려운 지경에 몰리자 폐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업을 접고 1년동안 재기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 보았지만 그동안 하던 금형은 워낙 시장이 포화상태이고 자본력도 없어서 재기불능이었다. 이미 팔려버린 집 때문에 조그만 전세방을 살면서 1년간 마땅한 일거리를 찾다가 포기한채 백수로 지내던 중 호주에서  사는 지인이 한번 건너와 보라는 말에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돈을 벌기 보다는 그동안의 삶에 지쳐버린 것이다. 

이민 가는 친구와 소주 한잔 하면서_1
이민 가는 친구와 소주 한잔 하면서_1

그날 저녁 친구들은 격려 반, 걱정 반 농반 진반의 덕담들을 술잔과 함께 건넸다.
취기가 오르고 친구의 '이민의 변'이 이어지자 술자리는 40대들의 세상 한탄, 신세 한탄 장으로 변했다. 마음에 쌓여있던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하나 둘 술자리에 쏟아져 나왔다. 
그 넋두리는 40대들이 일상과 부대끼며 느끼는, 그래서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현실 그 자체였다. 

한 친구는 예측가능성이라는 말로 의견을 냈다. 그러면서 공무원이 부럽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신분보장이 되는 직장에서 정년까지 예측 가능한 생활을 할수 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500대1씩 되는 것이다. 
이 친구는 일반 직장에 다니는 누구라도 이런 예측 가능한 생활을 할 없으니 하루하루 불안하고 초조하다며 언제까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살아야 하는거냐고 하소연했다. 그 말에 누구도 토를 잘지 않았다.

그래서 이민가는 친구가 부럽다는 말도 나왔다. 이 친구는 불확실성이라는 미로에 갇혀있다 빠져 나가니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15년간 대기업에 근무하며 재산을 모은 친구나, 조그만 식당을 하면서 그냥저냥 보통의 서민으로 살아온 친구나 모두 다 팍팍하기는 매 한가지라는데 다같이 공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활이 그 이상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월급으로 사교육비 대고, 대출금 이자와 자동차 할부금 갚고, 시골 부모님 용돈에 형제 친척 친구 경조사 챙기고 나면 그만이었다. 주식투자도 했지만 여느 개미처럼 손해만 보고 말았다. 우리 모두의 삶이 전부다 그러그러하게 비슷했다.

가지고 있는거라고는 32평 아파트나 조그만 개인주택이 전부고, 그나마도 아이들 대학 학비에 시집 장가는 무엇으로 보낼건지, 일찍 명예퇴직 하고 나면 노후는 또 어쩔건지...
이민 가는 녀석 환송회 해준다고 만난 자리에서 각자의 신세타령과 한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나이 40대에 이민을 떠나는 친구에게서 우리는 오늘날에 가정을 이끌어 가는 가장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았다. 새해에는 조금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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