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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성역의궤 해석의 오류
학자들이 치밀하게 연구해야
2020-03-30 07:41:15최종 업데이트 : 2020-03-30 14:23:43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2016년 수원화성 완공 220주년, 정조대왕 즉위 240주년을 기념해 1977년에 간행한 화성성역의궤 국역본을 교정, 보완해 재 판본을 발간했다.

2016년 수원화성 완공 220주년, 정조대왕 즉위 240주년을 기념해 1977년에 간행한 화성성역의궤 국역본을 교정, 보완해 재 판본을 발간했다.


지난해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수원화성' 관련 학술대회가 열렸었다. 발표를 했던 전문가 한명이 "왜 수원화성에는 해자가 없는지 궁금합니다"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발표를 마쳤다. 화성성역의궤에 해자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기본적으로 '화성성역의궤'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전문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의 무지가 오류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어 안타깝다.

다산 정약용의 수원화성 축성 기본 계획안을 정조대왕이 재정리한 것이 화성성역의궤 권1의 '어제성화주략'인데 여기에 호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땅을 파서 호를 만들면 흙은 성이 되고 호는 해자가 된다며 해자를 파서 거기에서 나온 흙을 취해 성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성과 해자와의 거리, 해자의 깊이, 너비, 해자를 파는 기구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 기록만 보면 해자를 판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 권수(卷首) '화성의 전체 국면'에는 또 성은 있는데 못을 파지 않는 것을 군사상의 단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 자체가 이미 산을 의지하고 있는데 못을 어떻게 사방에 두를 수 있겠는가. 화성을 처음 쌓으려고 할 때에 주략에 따라 먼저 성 둘레에 못을 파야 할 곳을 구하고 그 흙은 성 쌓는 데에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남쪽 성 밖과 북문 옆에는 자연적으로 깊은 도랑이 있고 서산의 뒤와 동성의 아래에도 자연적인 해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성 둘레에 다시 도랑을 파지 않더라도 저절로 지형에 따라서 견고한 성 구실을 하게 되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자연적인 해자가 있어 해자를 파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소장된 한글본 정리의궤를 수원시에서 복제했다.

프랑스에 소장된 한글본 정리의궤를 수원시에서 복제했다.

 
'한글본 정리의궤'에 상께서 내리신 주략을 받든 처음에 먼저 해자 파기를 강론하여 겸하여 흙 쓰기를 취하였더니 삼태기와 삽이 일제히 모여 모래와 석각이 두루 드러나 공사비용은 점점 많아지고 일은 더욱 더디게 진행되어 마지못해 땅 파는 역사를 그만두었다. 이제 남성 바깥과 북문 곁에 절로 생긴 깊은 개천이 있고 서산 뒤와 동성 아래에 또한 절로 긴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으니 비록 한 성을 두른 참호는 아니나 충분히 땅을 따로 굳게 지킬 수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어제성화주략' 대로 해자를 파기 시작했는데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공사비용이 불어나자 마지못해 해자 파는 공사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수원화성에 해자가 없는 진짜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학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옛날 지식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새롭게 발굴되는 기록에는 문외한이 되는 것이다. 학자라면 연구하고 학술발표를 하는데 바빠야지 그렇지 않은 세상일에 바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77년 수원시에서 화성성역의궤 국역본을 발간했다. 2016년 수원화성 완공 220주년, 정조대왕 즉위 240주년을 기념해 1977년에 간행한 화성성역의궤 국역본을 교정, 보완하고 옥영정 교수의 논고를 추가해 재 판본을 발간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역사자료총서 3, 수원화성 완공 220주년 기념 출판, 화성성역의궤 역주'라는 책으로 보급판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세계유산 수원화성의 축성 과정과 당시를 살아가던 조상들의 시대정신을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재판 발간사에 썼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북서포루와 주변 성벽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북서포루와 주변 성벽

 
책 뒤에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초판 해설이 실렸다. 화성성역의궤의 편찬 동기는 성역을 끝낸 병진년(1796, 정조 20) 9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상(임금)이 조심태에게 하교하시기를 옛 사람들은 작은 다리 하나를 놓더라도 그 사실을 돌에 새겨 놓고 있는데, 하물며 이번 성역 에서랴. 역사가 컸을 뿐 아니라 대단한 기술을 필요로 했던 바이니 기적을 반드시 거론해야 함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즉 빨리 서두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어서 봉조하인 김종수에게 제진하기를 명하였다라고 했다.

위 해설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위 내용은 '화성기적비'에 대한 내용을 '화성성역의궤의 편찬 동기'로 오해한 것이다. 이 책 133쪽에 내용이 나온다. 조심태에게 하교하시기를 ...공적을 기록하는 처사가 있어야 하겠다. 조심태가 아뢰기를 이 일은 이미 치석(治石)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고, 그러면 속히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곧이어 봉조하 김종수에게 명하여 제진(製進)하게 하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심태는 이미 비석을 준비해 놓은 상태이고 정조대왕의 명을 받은 김종수는 1797년 1월에 화성기적비문을 지어서 바쳤다.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란 화성을 쌓은 공적을 기록한 비문이란 뜻이다.

수원화성에 대한 해석의 오류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도량형을 잘못 환산해 성곽의 규모나 건축물이 불확실하게 되면 복원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부분에 대해 학자들의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화성성역의궤, 한글 정리의궤, 수원화성,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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