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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칼럼] 수원시 모든 시작은 성신사에서 비롯돼야
언론인 김우영
2018-11-10 11:28:29최종 업데이트 : 2018-11-12 09:32:19 작성자 : 편집주간   강성기

공감칼럼

수원시의 모든 시작은 성신사에서 비롯돼야

한정규 시민기자가 최근 e수원뉴스에 '성신사 화성 성신신주 교체해야'란 주장을 실었다. 그의 주장에 동감한다. 그는 현재 성신사에 있는 신주가 '화성성신신위(華城城神神位)'라고 되어 있다면서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로 고쳐야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한글본 정리의궤에 기록된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 부분 기사를 들었다.

 

"9월 19일 묘시에 성신의 위판을 조성하니 재목은 태상에서 봉하여 향, 축문과 함께 사관 겸 춘추 김양칙이 명을 받들고서 가지고 와 우화관 재소에서 삼가 조성하였다.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 6자로 대축이 글을 써서 용정에서 모시어 성신사에 봉안하니 그 때는 진말사초(辰末巳初)였다. 즉시 제사를 설행할 적에 헌관은 수원부 유수 조심태요, 전사관 겸 대축은 수원부 판관 홍원섭이요, 재랑은 남양부사 전의현이요, 축사는 용인현령 정우태요, 찬자는 수원부 중군 김후요, 알자는 영화도 찰방 이오진 이었다. 제사 지내는 의주는 내각에서 내려왔다"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 6자로 대축이 글을 써서..."라고 명확하게 기록돼 있는 것이다.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란 글씨를 쓴 '대축'은 '수원부 판관 홍원섭'이었다.

 

이런 확실한 기록이 있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당장 '화성성신신위(華城城神神位)'란 글씨를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로 고쳐야 한다.

성신사의 가을

성신사의 가을

그러고 보면 한정규란 친구는 참 대단하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지만 인문학에 관심이 많다. (사)화성연구회에 가입한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지난 화성문화제 때는 '수원화성 낙성연'을 훌륭하게 기획·재연해냈다. 역시 화성연구회 회원인 김준혁 한신대 교수 등이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한글본 정리의궤를 연구해서 기획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 마니아로써 음악평론가에 가까운 공연 리뷰를 쓰기도 한다. 어디 그뿐일까.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다. 대한민국서예대전에 입상할 정도의 전문 서예가이기도 하다.

 

한정규, 이 친구는 집요하다. 의심이 풀릴 때까지 자료를 찾아보고 현장을 답사한다. 이번 '화성성신지주(華城城神之主)'를 찾아낸 것도 이런 끈질긴 노력의 결과다. 내 후배지만 여러모로 배워야 할 부분이 많다.

 

성신사에서는 매년 연초에 고유제가 열린다. 화성연구회 회원들은 2002년 1월 12일 당시 강감찬 동상 옆 잔디밭에서 성신사 복원을 기원하는 첫 고유제를 시작으로 매년 고유제를 지내왔다.

 

지난 2월 22일 본 칼럼 "성신사(城神祠), 만세에 흔들리지 않는 터로 정하라"에서도 밝혔듯이 성신사는 정조대왕이 고유문(告由文)을 직접 지을 정도로 중요한 시설이었지만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훼철됐다. 일제가 민족정기와 왕기가 깃든 화성행궁을 파괴하면서 함께 없앴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에 (사)화성연구회 회원들은 2000년경부터 화성 안팎의 미복원 시설물을 찾는 작업을 하면서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조선시대 수원의 행정관청인 이아(貳衙)와 남·북지, 사직단, 종각, 미로한정, 중포사, 감옥, 중영, 성 돌을 뜬 부석소 등의 위치를 밝혀낸 것이다. 성신사 위치도 이 무렵에 찾아냈다. 화성성역의궤의 설명과 화성전도 등 옛 기록, 그리고 일제시기와 현재의 지적도, 고로들의 증언들 토대로 주말마다 만나 연구하고 현장을 답사했다. 마침내 당시 팔달산에 있던 강감찬 장군 동산 일대가 성신사 자리임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2004년 지표조사 때는 '왕(王)'자가 새겨진 기와 파편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성신위패

성신위패

그 때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중건해야 할 건물이 성신사라는 것을 인식했다.

 

정조대왕은 화성 완공을 앞두고 "첫째의 할 일은 좋은 날을 점쳐서 먼저 성신묘(城神廟)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후 때에 맞추어 향을 내리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만세에 흔들리지 않는 터로 정하면 신이나 사람이 함께 화락하고, 나에게 수(壽)를 주며, 나에게 복(福)을 주어, 화성이 명실상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신사는 1796년 7월 11일 터파는 공사를 시작했고 위패는 1796년 9월 19일 아침 6시에 봉안했다.

 

정조대왕은 해마다 봄, 가을 맹삭(음력 1월, 7월 초하룻날)에 성신사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축문도 직접 지었다. "저 화산의 남쪽에 성을 쌓으니 이것이 곧 화성이라, 땅은 천연의 웅장함 본받으니...(중략)...만세토록 오랜 터를 여러 사람 마음을 합하여 만들었네...(중략)...성주가 제사하니 많고 많은 영광이라 천만 억 년 다하도록 우리 강토 막아주소서"라고 기원했다. 이 글은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성주가 제사하니 많고 많은 영광이라 천만 억 년 다하도록 우리 강토 막아주소서" 성신사 중건에 가장 큰 역할을 한 화성연구회가 매년 이곳에서 고유제를 올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화성연구회는 앞으로 성신사 고유제를 수원의 대표적인 축제 가운데 하나로 만들 계획이다. 수원시와 시민들도 성신사의 가치를 눈 여겨 보길 바란다. 우선 수원에서 열리는 큰 축제나 행사 때 제일 먼저 이곳에서 고유제를 지냈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새해 첫날이나 화성문화제 전날, 그리고 수원시의 의미 깊은 행사 때마다 성주인 시장이 성신에게 고하고 "천만 억 년 다하도록" 수원에 사는 모든 시민들이 수(壽)와 복(福)을 받으며, 호호부실(戶戶富實) 인인화락(人人和樂)을 기원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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