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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요, 흑백사진관
윤수천/동화작가
2017-06-04 13:22:21최종 업데이트 : 2017-06-04 13:22:2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우리 집은 사진이 좀 많은 편에 속한다.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때마다 찍어 놓은 사진들이다. 대부분의 사진들이 컬러지만 개중에는 흑백 사진도 더러 있다. 아니, 더러 있는 정도를 넘어 제법 된다. 

그런데 요즘 내 눈을 잡고 놓지 않는 것은 컬러 사진이 아니라 바로 그 흑백 사진들이다. 70년대 초, 수돗물이 들어오기 전 마당에서 펌프 물로 등목을 시원스레 하며 깔깔대는 우리 집 아이들. 강아지 인형을 안고 마루에 나란히 앉아 포즈를 취한 세 남매. 포장도 안 된 길에서 세 발 자전거를 타는 동생의 등을 밀어주는 큰아이. 연무대 옆 잔디밭 길을 걸으며 산책을 즐기는 집사람과 세 남매. 눈 쌓인 봉화대 비탈길에서 비료 포대를 썰매 삼아 미끄럼을 타는 큰아이. 동네 친구들이랑 공터에서 공을 차며 노는 아이들. 복실이를 데리고 노느라 정신없는 세 남매.

보면 볼수록 정겹고 미소가 지어진다. 어디 그 뿐인가. 내 고등학교 때 사진은 거의 흑백사진이다. 경복궁에서 있은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고 돌아와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어둠침침한 교실에 모여 열띤 토론을 하는 문예반 친구들. 잣나무 아래 둥글게 모여앉아 이야기에 몰두하는 검정 교복의 친구들. 체육복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공을 차는 가난한 학생들. 

그런가 하면 대학교 때의 사진도 눈에 띤다. 겨울방학을 맞아 안성에 내려가 문학의 밤을 거창하게 치르고 나서 기분을 낸답시고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찍은 사진도 흑백사진이다. 그런데 그 문학의 밤은 평생 잊지 못할 웃음거리를 낳았다.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대학에 갓 입학한 우리 초년생들이 뜻 깊은 일을 한답시고 벌인 게 문학의 밤. 포스터까지 만들어 거리 곳곳에 붙였는데 그 타이틀이 '흙 문학의 밤'이었다. 문학의 밤 앞에 '흙' 자를 붙인 것은 고향(고장)을 사랑한다는 뜻을 은연 중 나타낸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소문이 나는 바람에 몰려든 청중들로 읍민회관이 때 아닌 아수라장이 되고 만 것이었다. 

즉 김진규와 조미령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흙'을 상영한다는 헛소문 탓이었던 것. 그 바람에 읍민회관이 수용의 한계를 넘어 아예 문조차 닫을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조용해야 할 문학의 밤 행사가 어찌 됐겠는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당시엔 볼거리가 별로 없어 영화 한 편을 공짜로 보는 일도 횡재에 가까웠다) 회관에 입장하지 못한 청중들이 던진 돌멩이에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는 불상사가 나고 급기야는 경찰관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문학의 밤 행사치고 이렇게 거창한(?) 행사를 치른 것은 아마 우리 말고 없을 줄 안다.

아, 어디 그뿐인가.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누나와 찍은 사진도 흑백사진이다. 그것도 카메라 사진이 아니라 사진관에 가서 버젓이 찍은 사진이다. 가난했던 시절에 어떻게 사진관에 가서 찍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나는 앨범을 들여다볼 때마다 이런 사진들이 흑백사진이 아니라 컬러사진이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고 생각해 본다. 모르면 몰라도 사진을 들여다보는 맛이 지금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한때 잇따라 문을 닫았던 필름 사진관, 그 가운데서도 흑백 전문 사진관들이 곳곳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아날로그 향수를 타고 서울, 경기도, 부산, 대구 등지에서 다투어 문을 열었고 소문을 들은 고객들도 하나둘 찾는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옛 수원천의 모습
옛 수원천의 모습

흑백사진은 흑백사진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있다. 바로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빛'이다. 흑백은 색을 제거하고 순수한 빛만을 보여준다. 그런 관계로 흑백사진은 컬러사진이 보여주지 못하는 깊이와 정직함이 있다. 여기에다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건 마치 오래 사귄 친구를 대하는 기분이다. 일순간에 눈을 확 끌어당기는 요란스러움 대신 들여다보면 볼수록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 은근한 맛이 흑백사진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우리 주변에서 자취를 감췄던 흑백사진관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반갑기 그지없다. 마치 오래 헤어졌던 친구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다.

윤수천, 동화작가, 흑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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