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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7-06-17 08:33:29최종 업데이트 : 2017-06-17 08:33:2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봄철 미세먼지가 극성이었다. 몸이 즉각 반응하여 기관지가 글겅글겅, 찌뿌둥하고 여느 때처럼 술이 당기지 않는다. 하지만 며칠이나 가랴. 식탁 위 고량주. 조그만 백자 잔은 옆에 놓였다. 손이 간다. '병후에 술 마실 수 있어 오늘 아침 한 잔 들이켰네' 병후음(病後飮)이다. 그리고 며칠 후. '이내 몸도 옛날 용기 남아 있어 서너 잔을 기울여 마셨노라'. 이번엔 '닷새 뒤에 또 마셨다(後五日又飮)'고 자체 발광이다.  

언젠가 인계동 나혜석 거리. 길거리 공연을 보면서 술 생각이 났다. 급한 김에 마트에서 달랑 소주병만 챙겼다. 정작 마시려니 난감하다. 안주고 술잔이고 없으니. 얼른 좌판에서 참외 몇 개 골랐다. 그리고 반쪽씩 잘라 속을 골라내니 멋진 술잔이다. 술잔에서 나는 참외 향이 그만이다. 안주는 야금야금 술잔 가장자리를 먹어 들어가면 다음 술잔이 기다린다.  아내 역시 향내 나는 참외술잔(香瓜盞)을 좋아한다.   

선인들도 과일 술잔을 즐겼다. 이규보는 '쪼개어 금잔을 만드니 찬란한 보배로군' 라 하여 귤로 만든 술잔(橘盞)을 노래했고 오척지(吳陟之)는 주인이 귤을 잘라 귤껍질로 만든 술잔으로 순배하자 술잔마저 먹어버려 웃음거리가 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냄새나는 술잔도 있다.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이 젊었을 적 여러 벗들과 함께 삼각산으로 유람을 갔다.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은 아무도 가져간 사람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의 새로 만든 말 가죽신으로 문안공이 먼저 술을 따라 마시니 벗들도 차례로 마셨다. 그리고 서로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 술잔(皮鞋杯)의 고사(古事)는 우리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좋지 않을까?" 
한편 고대 중국 남자들 중에는 전족(纏足) 숭배 광이 많았다고 한다. 금병매에는 서문경이 반금련의 꽃신(繡花鞋) 한 짝을 벗겨 잔을 감싸 술 마시는 병적인 장면이 있다. 

풍류가 넘치는 술잔은 벽통(碧筩)이다. 중국 당(唐), 원(元)에서 유행하고 고려 말 문인 사이 그리고 조선후기에도 유행했던 벽통은 연잎을 이용한 술잔으로, 연잎을 찔러 잎자루와 통하게 한 후 줄기를 구부려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술을 빨아 마셨다고 한다. 상비배(象鼻杯)라고도 하고, 이렇게 마시는 술을 벽통주, 이런 풍류가 벽통음(碧筩飮)이다. 양소임(梁紹壬)은 '술을 권하기에는 벽통이 가장 고상하고, 신발 잔은 비속하다'고 하였다(行酒以碧筩為最雅,鞋盃則俗矣)

은퇴하기 전. 양조장에 부탁한 걸걸한 막걸리 한 말과 수박 한 통을 싣고 화양동 계곡에 도착, 물가에 자리 잡았다. '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술잔 수를 꽃잎으로 셈하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안주는 수박 한 통으로 낙찰되고 막걸리 잔을 찾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잔이 없다. 이를 어쩔꼬? 다행히 차안에 노란색 양은대야가 있다. 물속에 휘휘 저어 헹군 다음 막걸리를 쏟았다. 그리고는 숨을 길게 내뱉고 대야 가장자리에 입을 대고 들이킨다. 맛이 그만이다. 얼른 대야를 윗사람에게 돌린다. 무릇 술잔이란 술을 따라 마시는 그릇일진데 세숫대야면 어떻고 탁배기 잔이면 어때! 세숫대야 술잔(臉盆杯)의 전설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술잔으로는 장안문 '거꾸로 왕대포' 주인 뚱땡이의 맥주잔이다. 그는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한숨에 마시고는, 별일 없다는 듯 주문한 안주장만을 시작한다. 유리잔(玻璃杯) 통음(痛飮)이다.

나의 막걸리 잔
나의 막걸리 잔

내게는 전용 백자대접 막걸리 잔이 있다. 맡겨둔 화성 향남 식당에 훌쩍 찾아가면 눈치 빠른 주인아주머니는 웃음 지며 대접부터 내온다. '막걸리에는 묘한 이치가 있기에' 한 잔 기울이면 잡다한 생각은 사라지고 날개 단 듯 하늘높이 날아오른다. 대접음(大碗飮)이다. 하기야 '맑은 술은 성인(聖人)과 같고 탁한 술은 현인(賢人)과 같다는데, 이미 성현을 다 마셨으니, 내 어찌 신선을 구하려 하겠는가?' 

미세먼지, 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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