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칼럼] 느린 영혼들과 어울린다면
김재철/농학박사, 칼럼니스트
2012-09-19 09:21:15최종 업데이트 : 2012-09-19 09:21:15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경기대 입구 '반딧불이 화장실'에서 광교산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 산기슭에 텃밭을 낀 허름한 가정집 식당이 있다. 입구 한편에는 나름대로 수석도 놓여있다. 보리밥, 매운탕 등이 주 종목이지만 주인이 추천하는 음식은 단연 청국장이다. 청국장은 우리 고유 발효식품 중 하나로, 건강식품으로 거듭나는 음식이지만 구수한 맛과는 달리 독특한 냄새 때문에 적잖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린다.

주인은 이점이 께름칙했을까. 유독 청국장 간판만은 따로 화장실 간판 밑에 놓았다. 들어간 것은 어차피 이곳으로 가는 것이니 냄새나는 것을 탓하지 마라. 누가 청국장 먹기를 두려워하는가? 기막힌 해학에 산행 후 막걸리가 생각날 때면 가끔 발걸음을 옮긴다. 

[칼럼] 느린 영혼들과 어울린다면_1
[칼럼] 느린 영혼들과 어울린다면_1

건강 때문에 한 3년 살았던 충청도 판교 농촌마을에는 개를 좋아하는 고희가 넘은 노인이 한 분 계시다. 경운기를 몰고 우리 집 마당 앞을 지나칠 때면 만세라도 부르듯이 으레 두 손을 번쩍 들어 신호를 보낸다. 그만큼 경운기 운전이 자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소주도 잘 마신다. 

지난해 가을, 한 잔 생각에 방문했다. 산 밑을 따라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다. 벌써 밤이 많이 떨어져 있다.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밤을 줍는다. 그런데 벌레가 많이 먹었다. 벌레가 먹어 일찍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골라 골라 몇 개 집어 들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개들이 먼저 반가워한다. '길목에 밤이 많이 떨어져 있어요'. '아니 그걸 주었어?' 조금은 낭패스런 표정이다. 

평소 괜스레 무시하며 깔끔을 떠는 심술첨지 노인 한 분이 뒷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 몰래 기웃기웃 길가의 밤을 줍고 있는 모습이 먼발치로 눈에 띠어, 골탕 먹이려고 개 먹이로 쓸 벌레 먹은 밤을 한 자루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재기 발랄 기발한 정수동' 이다. '아, 이런, 내가 걸려들었네'.

판교장터 허름한 이층 건물 소문난 의원에는 여든은 가깝게 보이는 의사가 있다. 복통이 심하여 걷기도 힘든 차에 옆집 차에 실려 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비좁은 계단은 몹시 가파르니 조심하라는 표시가 있다. 좁은 진찰실에 들어서니 의사는 볼펜을 들고 대학노트를 집어 든다. 그리고 굼뜬 동작으로 몸 상태, 처방 내용 등을 적는다. 위경련이다. 처방전은 간호사가 접수대 컴퓨터에 다시 입력해야 나온다. 

약국은 1층. 약사는 할머니다. 약봉지는 손으로 접는다. 이번에는 개에 물렸다. 의사는 여지없이 대학노트에 볼펜을 집어 든다. 의사가 직접 손가락을 소독하고 거즈로 덮고 붕대를 감는다. 위경련은 이틀 만에 완치, 상처는 이틀 만에 붕대를 풀었다. 

응급실, 접수번호도 없이 느림을 실천하는 의원이지만 진료마일리지는 짧고 치료효과는 빠르다. *진료마일리지-환자가 진료받기까지의 이동거리(km)☓대기시간(hr)(푸드 마일리지를 본떠 본인이 만든 비공식 용어)

읍내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때가 늦어 손님은 옆 탁자에 젊은 두 사람만 있을 뿐이다.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어왔다. 기관지 때문에 정중하게 말렸더니 안팎을 들락날락 한다. 
미안해서 마시고 있던 고량주를 권하니 잘 받는다. 두 사람은 단감, 노란 고구마를 깎는다. 식당 주인에게도 한 조각 돌린다. 
오늘 시골집에서 단감을 따고 고구마를 캐 온 것이라며, 아예 차에 실어놓은 단감 1박스를 가져와 다 먹었다. 자연스레 고량주가 더해간다. 내가 넌지시 '시골집 단감과 고구마, 우리도 좀 주지 그래'. 그러자 옆 탁자는 명함을 건네주더니 집에 가져다준단다. 

다음 날 아침, 작취미성. 그런데 앞마당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단감, 고구마 1박스를 두고 간다. 과연 담배는 긴장을 풀어주고 고량주는 뒤끝이 없어 물질적(?) 소통이 잘 된다.   

나는 2000년 전 원삼국(原三國)시대 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원삼국시대 마을 터 위에서 영혼들과 함께 사는 셈이다. 
현재 살고 있는 발안마을 조성지에서 2002년 원삼국시대 마을 터, 옹관묘 등이 발굴되고, 그 주위 혹은 터를 밑에 두고 마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폼페이를 밑에 두고 화산재 위에 살던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카르나크 신전을 밑에 두고 모래더미 위에 살던 이집트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 그들은 밑의 세계를 모르고 살았지마는 나는 밑의 세계를 알면서 사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자가용, 스마트폰 등은 멀리 보이고 산천초목, 동식물은 쉽게 눈에 들어온다. 툭하면 2000년 전 영혼들을 앞에 두고 막걸리를 즐긴다. 

'천사와 함께 나눈 차 한잔'에서 정말 아름다운 정원은 나무 한 그루만 있더라도 주인과 어울리는 모양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해학적 간판, 벌레 먹은 밤, 느림의 의원(醫院), 시골집 단감 등은 각각 그들 주인과 잘 어울린 모양이다. 또한 주인은 자기방식대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물론 내 영혼이야 2000년 전 많은 영혼들과 함께, 세월이 흘러 흘러 또다시 2000년 후에 이곳 사람들과 집터에서 막걸리 한잔 어울릴지도 모른다.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