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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문화, 화장실철학
양 훈 도(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
2013-03-18 11:47:29최종 업데이트 : 2013-03-18 11:47:2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얼마 전 수원시평생학습관 화장실 앞에 앙증맞은 빨간 통이 하나 설치됐다. 작은 우체통을 연상시키는 이 통에는 원고가 들어 있다. 화장실에 볼 일 보러 가는 사람 누구나 빼가질 기다리면서…. 원고는 매주 바뀐다. 이름 하여 화장실 인문학이다. 꼭 신문을 들고 변소에 가시던 아버지, 책을 들고 가던 나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배변이라는 동물적 행위와 사유라는 인간적 특성을 결합시킨 꽤 괜찮은 발상 아닌가?

화장실문화, 화장실철학_1
사진/김소라 시민기자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는 만성변비 환자였다. 하여 화장실에 앉아 끙끙거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 시간에 뭘 하겠는가. 많은 종교사학자들은 루터가 화장실에 앉아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어떻게 공박할까 궁리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1517년 비텐베르크 '만인 성자교회' 문 앞에 내붙인 저 역사적인 95개조 반박문도 바로 이 화장실에서 무르익었을 것이라고 본다.

자료를 뒤지다 보니 루터의 반박문이 적힌 '종교개혁 화장실'이 발견됐다고 보도한 2004년 기사가 눈에 띈다. 사실일까? 가보지 않아서 500년 쯤 전에 정말 루터가 구상했던 반박문 초안이 거기서 발견된 것인지, 아니면 화장실을 발굴한 뒤 반박문 가져다 놓고 호들갑을 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장차 관광명소가 되리라는 발굴 팀의 장담이 과히 빗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상이 어떻든 '종교개혁 화장실'이라는 명명은 화장실 인문학의 훌륭한 선례라 부를 만하다.

수원의 명소 '해우재'를 다녀간 관광객이 10만을 넘어섰다 한다. 화장실 박물관인 해우재가 문을 연 게 2010년 10월 말이니까 불과 2년4개월여 만이다. 세계 각국 공무원들도 한국의 화장실문화를 배우기 위해 해우재가 있는 이목동으로 뻔질나게 찾아온단다. BBC, 로이터 통신 등 쟁쟁한 매체들도 해우재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한다. 고 심재덕 수원시장의 예지와 혜안이 돋보인다. 심 시장의 근심이 말끔히 가셨을 듯하다.

해우재의 외양은 변기 모양이다. 하지만 디자인이 잘 빠진 탓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마르셀 뒤샹이 예술작품 '샘'이라고 우긴 변기보다 미적으로 훨씬 세련됐다. 물론 뒤샹의 발상은 예술의 개념 자체를 뒤흔든 사건이므로 양자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여튼 변기와 화장실도 훌륭한 건축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해우재 역시 몸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화장실 청소를 종교적 실천이라고 믿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을 본 적이 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동네 공중변소를 깨끗이 청소한다. 그게 이들의 예배란다. 워낙 희한한 종교가 많은 일본인지라 '세상에 이런 일이' 정도로 보아 넘겼던 듯하다. 그런데 최근 다음과 같은 대목을 접하고 무릎을 쳤다.

"어느 날 그냥 내 일을 즐기며, 일을 완벽하게 해보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이 화장실 청소야말로 세상의 모든 일 중에서 내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일을 주목해 보지 않고, 또 내일이면 그 장소가 또다시 더럽혀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최고의 수준으로 잘해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바로 그 일인 것이다.……청결한 화장실이라는 금방 사라질 질서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는-수없이 많은 내 경험으로 말하건대,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신(神)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본질, 세계의 진실 속으로, 그리고 창조된 세계로서의 자기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262~263쪽.)

아하, 그렇구나! 화장실 청소가 예술의 본질을 깨닫는 일이고, 종교적 실천과 연결되는 행위일 수 있구나! (여기서 리 호이나키가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설명할 겨를이 없다. 궁금하면 그의 책을 직접 사 보던지, 신학자 박경미가 쓴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에 실린 호이나키 소개 글("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를 읽어 보시라.)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일본의 화장실 청소교 교인들이 이런 심오한 경지까지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호이나키가 제대로 짚어주듯이, 화장실은 우리가 그동안 알던 그런 허접한 공간이 아니라 다층적 의미 공간일 수 있다. 화장실은 문화이고, 예술이고, 철학이다.

 수원시평생학습관은 화장실 인문학 참여자들에게 소정의 답례를 할 예정이다. 3월부터 5월까지 매주 바뀌는 글들을 일고 모아두었다가, 6월에 글을 읽은 소감이나 단상을 제출하면, 선착순 50명에게 원고를 엮은 작은 책을 준단다. 볼 일 보고, 명상하고, 글 쓰고, 선물 받으니 일석사조인가?

평생학습관 측이 인정하듯이 화장실 인문학은 '해우재'에서 비롯됐다. '해우재'가 수원을 화장실문화의 메카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착안해 구상한 인문학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람객 10만을 돌파한 해우제가 이제는 화장실문화를 넘어 철학의 경지로, 예술의 경지로 한 번 더 업그레이드되리라 기대해도 좋겠다.

※뱀발-정직하게 말해 호이나키의 책은 지난겨울 초입에 사 두기만 했지 읽지는 못했다. 박경미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하기 멋쩍어서 사 둔 책 해당부분만 얼른 읽고 옮겨 놓았다. 그래도 멋지다! 장담컨대, 박경미 교수의 책이든, 호이나키의 책이든 사 보셔도 손해 안 본다. 여러분의 뒷머리를 울리는 깨달음이 가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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