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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개혁 중심은 백성이다
최형국/문학박사,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시범단 수석단원
2014-02-23 11:03:01최종 업데이트 : 2014-02-23 11:03:01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봄의 시작을 알리는 삼월이다. 여기저기 산과 들에는 겨우내 움츠렸던 새싹이 기지개를 펴고 꽃이 피어 날 것이다. 모두들 그런 따사로운 햇살을 기억하며 봄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시대 삼월은 굶주림의 시간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이야기하는 보릿고개 시절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이다. 지난 가을에 농사지어 쌓아 둔 먹거리들이 모두 동났지만 아직 보리밭은 파랗게 물들어 보리알 하나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그저 아지랑이 피는 먼 산만을 바라보는 시절이었다. 

가장인 아비는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빌리러 간다. 이웃집 아니 마을 전체가 그런 상황이니 안정적으로 곡식을 운용하고 있는 관청에 가서 먹을거리를 빌려 온다. 그것이 환곡(還穀)이다. 문제는 이 환곡에 고리대금같이 높은 이자를 쳐 받아먹는 하급관리들이 문제였다. 쌀 한말을 빌리면 다음 가을에 되돌려 줘야하는 이자가 서너 말까지 늘어나기까지 했다. 자식들이 많고 노부모를 함께 봉양하는 가장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그 곡식을 짊어지고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입은 무서운 것이다. 오직 곡식 몇 알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빈곤의 악순환이다. 그렇게 보릿고개를 넘어 뜨거운 햇살을 견디며 여름을 보내고 오곡 풍성한 가을이 되도 즐겁지 아니했다. 지난봄에 빌려온 곡식을 몇 배로 갚아야 하니 다가올 겨울나기가 두려웠던 게다. 그런 가혹한 삶의 연속은 땅을 하늘처럼 모시던 농부들이 그것을 배신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빚은 괴물이다. 그 무서운 괴물이 피하기 위해 땅을 버리고 식솔들과 함께 야반도주를 한다. 이후 유랑을 하다가 굶어 죽던가, 아니면 땅을 파던 곡괭이가 탐관오리를 향해 겨눠지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최대 도적이라고 불렸던 '장길산'이 그런 가엾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우두머리였다. 

정조는 개혁을 생각하였다. 아비인 사도세자가 정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었기에 가슴에는 피맺힌 한이 있었지만, 그것이 개혁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아비로 생각하는 조선의 백성들이 있기에 그들을 위한 개혁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환곡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신하들과 고민하는 자리를 가졌다. 다산 정약용과도 가장 심도 있게 정책 운영방향을 논의했던 내용이 환곡을 비롯한 백성의 살림살이 안정화부분이었다. 

일단 도대체 환곡의 양이 얼마나 되고 이자가 어느 정도 수준인 것을 통계적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곡총편고(穀總便攷)>라는 국정보고서를 만들어 전국의 환곡상황을 분석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부족한 환곡의 양을 보충하기 위하여 각종 궁중 행사에서 남은 비용을 모두 환곡으로 돌리는 특단의 조치까지 취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진행한 을묘년의 원행 길에서도 남은 돈은 환곡으로 재편성하고 이자는 최저로 운영하도록 당부를 하였다. 그 환곡의 이름이 '을묘정리곡'이다.

그러나 그 정리곡을 가지고도 장난질을 하던 탐관오리들이 있었다. 정조는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솟구쳐 본보기로 엄한 문책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조금씩 환곡의 상황은 나아져갔다. 그렇게 조금씩 조선 백성의 삶은 자리 잡는 듯 했다. 허나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소위 말하는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며 조선의 백성은 나락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환곡의 이자는 해마다 몇 배씩 오르고, 그 이자를 가지고 매관매직이 이뤄져 부패의 악습은 점점 지독해져만 갔다. 그렇게 1800년대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한 민란의 시대의 열린 것이다. 

개혁은 결코 뛰어난 한 개인이 펼쳐낼 수 없다. 그리고 그 개혁의 과정에는 늘 반발하는 세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살이다. 그러나 고쳐내지 못하면 종국에는 모두 괴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요즘 세상의 화두인 인문학의 시대, 힐링의 시대를 어찌 그리 외치는지 고운 봄 햇살 아래 곰곰이 생각해 보자.

정조의 개혁 중심은 백성이다_1
수원 화성에서 야간군사 훈련을 펼치던 연거도의 모습.

수원 화성이 정조의 개혁정치를 대표하는 산물이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그것이 어떤 개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곽이라는 외부의 유형적인 부분만 집중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화성 안팎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중심에 두고 고민하면 쉽게 해결된다. 바로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과 부을 분산시키고, 삼남의 길목을 군사 요새화 시켜 국방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 중심에 백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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