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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볼 장 다 본' 화성인
김재철/농학박사, 칼럼니스트
2012-05-02 14:00:18최종 업데이트 : 2012-05-02 14:00:18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나는 화성인이다.
그러나 요즈음 TV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그런 화성인은 아니다. 지난 2009년 수원을 떠나 충남 서천의 농촌마을로 흘러들어 3년 동안 수도(修道)생활(?)을 끝낸 뒤 얼마 전 경기도 화성(華城)시에 주민등록을 하였기 때문이다. 

화성인은 인근에 위치한 원삼국시대 거주 유적지, 화성문화원, 향토박물관 등을 방문하고, 아파트단지 부근에 위치한 먹자골목 맛집은 이내 섭렵하였다. 자, 이번에는 발안장에도 한번 얼굴을 내밀어야지. 

마침 오늘은 발안 5일장 날이다. 봄바람이 다소 쌀쌀하여 조금은 두툼하게 옷차림을 하고 집을 나선다. 장터라고 해야 버스가 다니는 차도가 여느 시골길보다도 좁은데다, 인도가 없는 것 같이 좁아 어디에서 장이 열릴까하고 의구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막상 장터에 와보니 할머니 몇몇 분이 함지박에 봄나물을 담아와 좁은 인도에 옹기종기 앉아있다. 

나는 '볼 장 다 본' 화성인_3
나물파는 할머니

그런데 차도 따라 어느 골목에 들어서니 여기야 말로 장터다운 냄새가 난다. 생선 파는 아저씨, 과일 파는 아줌마. 상표 없는 화장품을 좌판에 널어놓은 할머니, 구운 오징어, 문어다리 냄새 풍기는 행상, 개고기 도소매 가게 앞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파는 여인네. 각종 묘목을 세워 놓고 정리하는 이들 등 좁은 골목길이 바글바글 그야말로 장터다. 당초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금강산도 식후경. 일단 장터 골목을 벗어난다. 그리고 큰길 건너 눈 여겨 둔 2,500원 짜장면 가격표가 붙어있는 식당으로 들어선다. 식당이라야 고작 2인용 탁자가 몇 개 정도이고, 벽을 따라 길게 송판이 붙어있어 그 앞에 제각각의 조그만 의자가 서너 개 놓여 있을 뿐이다. 반기는 사람은 후덕하게 생긴 중년의 주방장 주인아저씨 혼자다. 선불이라고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카드로 지불하면 본래 값을 받는다는 표지도 있다. 그리고 모두 셀프다. 물, 단무지, 양파에 춘장을 포함해서 탁자까지 가져오는 것 모두 손님이 하여야 한다. 주방에서 요리하는 주인이 물컵 등 위치를 알려준다.  

빈 그릇은 어디에 반납하느냐고 물어보니 손님이 없으니 그냥 두라고 한다. 주인은 발안 토박이다. 나는 3.1운동당시 일제 제암리교회 학살사건과 관련, 독립만세운동이 격렬했던 옛 발안장터가 궁금하여 물어 보았다. 발안천 다리 건너 서쪽 화성시보건소 가는 길목이 우시장터로 원래 장터이었으나 개발바람으로 이곳에 옮겨와 지금은 골목 한군데에서만 장이 선다고 한다. 

그리고 옛 장터 길은 미군 사격장으로 유명한 매향리로 가는 유일한 도로이었다고 한다. 장터 인근에는 각종 쓰레기가 널려있어 주민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장터로 들어섰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봄철 입맛 돋우는 고들빼기 한 봉지 사 들고 진즉 생각했던 헤어컷 집으로 향한다. 머리 컷은 6,000원이고 머리 마사지는 3,000원이다. 총각은 제주에서 올라와 8년째 이곳에서 머리손질을 한단다. 왜 도시에서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찾아오는 손님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란다. 
여기 손님은 주로 동남아 사람 등 외국인이 많지만 나 같이 머리 하얀 손님도 가끔 있단다. 머리 깎을 것을 염두에 두어 점심에 반주를 피한 것이 마음에 걸려, 혹시 막걸리 파는 식당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장터 안에 맛있는 지짐이를 파는 집이 있단다. 

머리도 깎은 김에 막걸리나 한잔 할까하고 어슬렁어슬렁 장터 막걸리 집으로 향한다. 문에는 민속 전(煎)집, 한편에는 민속 지짐이라고 쓰여 있다.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주인아저씨가 녹두전, 파전, 해물전, 모듬전, 호박전, 김치전 등 즉석에서 만들어 부친다. 
아주머니는 서빙 담당이다. 밑반찬으로 깍두기와 번데기가 나온다. 벽에는 '아버지 제사음식 주문 받습니다' 라는 글귀가 붙어있어 어째서 아버지 제사음식만 주문받는가 싶어 잠시 의아해 했다. 가는 눈을 하고 다시 보니 '이바지, 제사음식 주문 받습니다'. 

옆 좌석에는 모습이 다른 젊은이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물어보니 네팔 카트만두에서 왔단다. 예전 네팔 여행이 생각나 이웃처럼 반갑다. 번데기를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나는 '볼 장 다 본' 화성인_2
외국인 청년

그런데 병 막걸리는 3000원이고 화성막걸리는 5000원이다. 일찍이 화성막걸리가 맛있으니 집에다 두고 마셔도 좋다고 술 즐기는 토종 시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 물어보니, 주인아주머니는 맛을 보라고 가져온다. 모로미(もろみ) 맛이 난다. 모듬전이 맛있다. 손님이 고개를 돌리는 기색이 보이면 주인은 무엇이 필요하냐고 미리 미리 물어본다. 문을 나서니 아주머니가 인사한다. 다음에 젖(전) 먹으러 또 오세요. 잉? 

요즈음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술 해독력이 낮아져서 그런가 보다. 조물주가 지금부터는 조금씩 마시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지난번 피부과에 갔을 때 의사가 습진은 술 마시면 낫지 않아요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장터 분위기가 좋다. 그래서 수원에서도 못골 시장, 매탄동 골목시장 등을 돌아다녔고 지난 3년 동안 서천에서도 장날만 되면 장터로 출근하여 시골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막걸리 한 잔 걸치기가 일쑤였다. 물론 틈틈이 잔치국수와 막걸리로 허기를 채우면서 황학동 벼룩시장이나 인사동 골목길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나는 '볼 장 다 본' 화성인_1
장터

만해 한용운의 '채근담 강의' 여유로운 삶 한적(閒寂)편에 보면, 마음의 한적과 외부 환경의 한적이 있다 한다. <누추한 집에서 한가하게 살면 보고 듣는 것은 한정되어도 정신은 절로 광활해진다(棲遲蓬戶 耳目雖拘 而神情自曠)> 더불어 <산골노인과 어울려 지내면 예의나 교양은 부족하더라도 생각은 항상 진실하다(結納山翁 儀文雖略 而意念常眞)>. 오늘 '볼 장 다 본' 화성인은 다음 장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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