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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개념복원
박두호/언론인, 왓츠뉴스 대표
2012-07-11 08:29:12최종 업데이트 : 2012-07-11 08:29:1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조선시대 젊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과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화성축성 T/F는 정조의 명을 받아 화성 축성사업 계획서 '성설'을 제출했다. 이 계획서는 화성성역의궤에 '어제성화주략'이란 문건으로 남았다. 요즘으로 치면 4급 공무원 쯤 되는 관리의 계획서를 결재자인 임금이 자신의 명의로 기록에 남길 정도로 내용에 더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명저로 평가됐다. 1762년에 태어나 1783년 2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공무원 10년차 되던 32세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할 때였다.

다산은 축성 재료를 벽돌은 제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고 흙은 회를 발라도 무너지기 쉬우므로 돌로 해야 한다고 결론냈다. 성이 무너지는 것은 배가 부르기 때문으로 아래로부터 3/2 부분까지 점점 안으로 들여쌓다 그 다음부터 밖으로 내 쌓아 배가 들어간 구조로 하도록 했다.

돌은 돌을 뜨는 부석소 부근에 치석소를 두어 가볍게 다듬은 뒤 운반하도록 하고 돌의 크기에 따라 수레의 크기, 싣는 량까지 상세하게 계획했다. 돌을 나르는 수레가 다닐 길을 미리 닦았고 유형거라는 당시 수레를 개량한 운반기구도 고안했다.

화성 축성에 들어간 돌은 숙지산(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여기산(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팔달산(수원시 팔달구), 권동(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동말 추정) 등 가까운 곳에서 조달했다. 축성에 사용된 돌은 모두 20만1천403덩이로 이 가운데 숙지산에서 8만1천 덩어리를 만들어 가장 많은 양을 조달했다.

다산의 방대하고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200여 년 전 기술로 화성 축성의 대역사를 28개월 만에 완공할 수 있었다.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화성 성벽 5.7㎞를 돌아보면 돌 하나하나마다 장인의 세련된 기술과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돌은 이곳 수원 인근의 화강암 구성광물에 철분이 많았던 듯, 색이 순회색보다 연한 황색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20만개가 넘는 이 돌들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잘 맞춰져 있다.

일부 돌은 모서리에 홈을 파서 대각선 방향의 다른 돌과 결합했다. 성벽이 뒤틀리거나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현장 장인들의 세심한 배려다. 다산의 설계가 이러한 세세한 부분까지 반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인들의 기지가 보인다.

돌과 돌이 쌓여 만들어낸 외벽 구조는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고 있다. 성벽 어느 부분에 앵글을 맞춰도 돌의 배치와 균형에서 어색함이 없는 구성미를 느낄 수 있다. 미술 학도들이 이 성벽 돌 구조에서 구성을 배우기에 손색이 없다. 수원의 화가 가운데 한국화, 서양화를 막론하고 성벽 돌의 조형미를 화폭에 옮긴 이들이 적지 않다.

이렇게 다산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수많은 장인들이 돌 한 개 한 개에 혼을 담아 쌓은 화성인데 일부 훼손구간의 복원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해 아쉽다. 현대의 발전된 장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소득 수준에서도 200여 년 전 사업을 흉내도 내지 못하고 있다.

수원시는 오래 전부터 화성 성곽의 단절된 부분을 이어오고 있다. 동문사거리 창룡문과 동장대 사이 도로의 단절된 부분 40여m도 오래 전에 도로 기능을 남기고 상부를 교량 형태로 성곽을 이었다. 그런데 이곳 이어진 성곽의 돌 쌓은 모양새가 도대체 개념이 없어 차마 보기에 민망하다. 

돌의 색이 기존 화성 돌과 다르다. 황갈색이 섞인 화성의 돌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돌의 크기도 기존 화성의 크고 작은 돌로 구성된 것과 달리 일정한 크기로 규격화된 것을 쌓아 자연스럽지 못하다.
더욱 거슬리는 것은 사각형 돌이 수평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성은 경사진 언덕으로 이어질 때 성벽 전체는 경사면을 따라가지만 성벽을 구성하는 돌, 그 사각 선의 가로 변은 수평을, 세로 변은 수직을 항상 유지하고 있다. 그 가로 세로 선의 정렬된 모습은 잠시의 흐트러짐도 없다. 

동문사거리에서 연무대 방향으로 이어진 구간을 보면 동장대로 경사면을 따라가는 부분에서 이러한 기울어짐 현상이 두르러진다. 바로 옆 동장대 가까이 더 가파른 경사에서도 기존의 성벽은 돌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데...
정조대왕의 거둥 행렬이 이곳을 지날 일은 없어 정조가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다산이나 당시 돌을 쌓았던 조선시대 장인들이 이 복원 구간을 보면 뭐라고 할지 내가 부끄럽다.
문화재 복원이 그 정도면 됐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금 비록 작은 부분이라도 개념 있게 집행하는 수원이었으면 좋겠다.

최근 남수문이 복원됐다. 화성성역의궤의 도설과 건축에 사용된 재료 등을 충실히 고증하고 도설과 실제 건축과의 차이점 등을 모두 고려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도심 하천으로 변한 수원천의 기능을 감안한 배수시설도 더해졌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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