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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을이다
윤수천/동화작가
2012-09-02 14:28:29최종 업데이트 : 2012-09-02 14:28:29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누나는 편지를 참 잘 썼다. 매끄럽고 단단한 문장, 다식을 박듯 꾹꾹 눌러 넣은 적절한 어휘, 살짝살짝 보여주는 속마음...나는 누나의 편지를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짬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좋아하는 시집을 되풀이해서 읽듯이. 

어느 날 학교에서 불시 가방 검사가 있었다. 꼼짝없이 누나의 편지가 압수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호출했다. 나는 반성문을 쓸 각오를 하고 교무실로 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말없이 편지를 도로 주었다. "친누나는 아닌 것 같고...누구냐?" 선생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향에 사는 옆집 누나예요."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자 산생님은 "글이 아주 좋더구나. 문학을 하면 좋겠다." 그 말만 하고 어서 가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학창 시절에 문학 지망생이었다.

나는 다음 편지에 문학을 하면 좋겠다고 한 담임선생님의 그 말을 그대로 옮겨 누나한테 보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온 누나의 답장이 나를 웃겼다. "문학은 나보다도 수천이 네가 해야 해." 

지금 생각하면 나의 문학은 누나와의 편지 교환에서 시작되었지 않나 싶다. 나는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어느 날엔 그 또래의 고민을 털어 놓기도 했고, 어느 날엔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은 어쭙잖은 감상문을 적어 보내기도 했고, 어느 날엔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적으면서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가을이면 그 옛날 누나가 생각난다. 방학 때 집으로 찾아가면 늘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누나. 책상 위에는 소월의 시집이 꼭 놓여 있었던 생각도 난다. 누나는 '진달래꽃', '개여울', '엄마야 누나야'를 특히 좋아했다. 어느 날이던가, 누나는 소월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이런 말을 했다. "소월은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향기를 주고 있어." 

가을이다. 올 가을은 지난 여름이 유독 후텁지근하였기에, 여기에다 대형 태풍까지 끼어들어 한바탕 난리를 피웠기에 더욱 반가움이 인다. 그러고 보면 가을은 거저 맛볼 수 있는 계절이 아닌 듯싶다. 이글거리는 불볕더위와 먹구름, 장대비와 천둥 번개, 태풍...이런 장애물들을 차례로 넘고서야 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열리나보다.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김현승 시인은 그렇게 노래했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도 했다. 그렇다. 이 푸른 가을 앞에서 으스대거나 거만할 수는 없다. 겸손해야만 한다. 무릎이라도 끓고 앉아 기도라도 올려야 한다. 이 위대한 가을을, 성스럽기까지 한 가을을 뻣뻣이 선 채로 맞이할 수는 없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가 붉디붉은 고추를 한 박스 보내왔다. 올 고추농사가 생각보다 잘 됐기에 자네 생각이 나서 보낸다는 글도 몇 자 적어 보냈다. 그 친구는 전에도 사과며 배를 그렇게 종종 보내왔다. 
어디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고 첫 번째 동시집을 내어 그 친구에게 보냈을 적엔 그 바쁜 틈에도 동시집을 정성들여 읽고는 '누나의 가을'이 특히 좋다고 전화까지 걸었다. 

'꽃밭에서 누나가/왼 종일/꽃씨를 받는다//꽃씨를 받으며/해의 뜨건 말도.함께 받는다//빛나고 있는/누나의 손등//줄기에서 따낸/작은 약속들이/고 귀여운 약속들이/뿌듯이 손 안에 차오는 환희//누나의 앞치마가/빨갛게 타는 오후엔//꽃밭과 마당, 부엌까지도/찰찰 넘치는/꽃의 잠//누나는/꿈속에서도/꽃씨를 받는다/해씨를 받는다'-'누나의 가을' 전문.

 

아, 가을이다_1
아, 가을이다_1

그렇다. 가을은 꽃씨를 받는 계절이다. 우리 인간들도 가을이 오면 각자의 꽃씨를 받는다. 나는 어떤 꽃씨를 얼마큼 받게 될까. 이것을 생각하다 보면 왠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고, 게으르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고추처럼 자꾸 얼굴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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