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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광개토태왕비(碑)도 노렸다
김재철/칼럼니스트, 농학박사
2012-09-09 14:41:16최종 업데이트 : 2012-09-09 14:41:16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일본은 광개토태왕비(碑)도 노렸다 _1
1910년대에 촬영한 광개토호태왕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영토를 넓힌 왕은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이다. 또한 자주적인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한 왕이기도 하다. 왕은 재위 22년 동안 북으로는 만주 일대, 남으로는 강화도와 원산을 잇는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은 장수왕은 서기 414년 고구려의 수도인 압록강변, 지금의 중국 땅 집안현에 선왕의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운다.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와 왕의 재위 시 영토 확장 그리고 사후 묘 관리에 관한 것으로 고졸한 예서체로 기록되어 있다. 장수왕이 13년 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 이 비의 관심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더구나 청나라는 만주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따라서 이 비는 19세기 후반(1880년경) 중국인 농부가 우연히 재발견하기까지 역사기록 속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1000년이 지나 '용비어천가'에서 그 존재를 인식하고, 사학자 신채호가 1914년 답사하였다. 능비는 높이 6.4m, 무게 37톤으로 사면에 글씨를 새긴 직육면체로 1775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석을 둘러싸고 한, 일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북아 최고의 비밀을 간직한 능비이다. 

이 비의 발견 직후인 1883년, 일본 육사 출신의 스파이 사코 가게아키(酒乃景信)는 이 비문의 탁본을 입수하여 참모본부에 제출한다. 일본은 학자를 동원하여 5년간에 걸쳐 비문을 판독한다. 
판독문을 살펴 본 참모본부는 기쁨에 넘쳐 이를 일왕에게 헌상하였다. 당시 일본은 일본서기에 날조된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판독된 것이다. 아예 일본은 집안현의 관리와 협상하여 이 비의 반출을 기도하였다(*이번에는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자기 역사라 우긴다). 

유독 일본이 눈독을 들인 부분은 대왕 재위 6년 병신년(丙申年, 396년)의 내용이다.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 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 辛卯年來 渡海破 百殘 □□□羅 以爲臣民...) 일본은 이를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하여 이를 속국으로 삼았기 때문에...'로 풀이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채호, 정인보 등이, 북한에서는 박시형이 '백제,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국으로 일찍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로 고구려에 오니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파하였다.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풀었다. 자연히 뒤의 내용과 연결된다. '영락(永樂) 6년 병신에 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여 승리하였다'(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비문의 연구는 지난 100년간 거의 일본이 독점하고, 더구나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의 학문적 성과는 별로 없었다. 이는 날조한 임나일본부설을 사실화하고, 한반도를 일본이 경영하였다는 억지를 합리화하기 위한 일본의 끈질기고 계획적인 해석 활동이었다. 
나아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우리 국토를 넘보는 잠재적 인식까지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당시의 국제정세나 해적집단인 왜, 일본열도로 볼 때 일본의 해석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비문의 탁본으로 보아 가장 중요한 자구인 도해파(渡海破)는 글자의 위치가 비정상적이고, 비 발견 직후 일본 스파이에 의하여 글자가 조작되었다는 일본 동포 이진희의 새로운 설이 나왔다. 

최근 일본은 억지 독도영유권 주장 등 인접 국가 도서영유권 주장에 혈안이 되어 있다. 
독도 광구권까지 설정하고, 1954년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일본 외무성에서 독도 소유권을 주장한다. 먼 훗날을 위하여 자료를 축적하기 위함이다. 광개토왕비 해석의 경우를 보더라도 일본은 독도에 덧붙여 경상도, 전라도까지 가져가려 억지 주장할 판이다. 

영악(獰惡)하게도 일본은 세대를 넘나들면서 끈질기게 우리를 우롱한다. 우리도 후대를 위한 국책사업으로 잊힌 우리 영토에 대한 연구결과 등 폭 넓은 자료를 축적해 두어야겠다. 
대마도는 본래 신라 땅이었고, 고려 말 박위의 정벌, 조선 초에는 김사형, 이종무가 정벌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대마도는 우리 땅, 주장 좀 해보자. 
'독도는 우리 땅' 노래들은 지도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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