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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군주 정조의 효행능행로 길목
강대욱/경기도박물관 초대관장
2010-12-13 11:02:43최종 업데이트 : 2010-12-13 11:02:4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화성축성, 국영농장 대유둔, 농경문화의 터전

언필칭 사람들은 수원을 가리켜 효원의 도시라고 한다. 그것은 정조의 한서린 사도세자의 서울 답십리에 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산하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능행길목인 수원에 화성(華城)을 축성한데서 연유한다.

지지대고개와 노송지대 사연이 그러하고 수원의 지명 하나하나에 이르기 까지 정조의 효심이 억겁의 인연을 일깨우며 미소하는 곳이 수원이다.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비참한 죽음을 해야 했던 부왕 사도세자의 처절한 장면을 11세에 목도한 정조였으니 평생의 한사(恨事)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정조는 왕위에 오른지 13년 1789년 8월 9일에 사도세자의 능침을 현륭(顯隆)으로 결정하고 천봉례를 10월 7일에 거행한다. 이로서 현륭원능행 효행 100리길의 여정이 수원을 누비며 민생군주, 정조와 수원의 인연은 역사를 관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능행길의 피할 수 없는 팔달산을 중심으로 한 화성축성은 수원과의 첫 인연이다. 1790년 두 번째 능행길 2월 8일 왕궁을 떠난 정조는 수원부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화산의 능에 전배를 드린 후 수원부로 돌아와 동헌을 장남헌, 내사를 복내당(福內堂), 사정을 득중정(得中亭)이라 이름짓고 친히 편액을 썼다.

다음날 독산성에 행차하여 운주당에서 산성의 노인들을 위로하고 성내의 백성들에게는 양곡을 지급하였는데 이것은 부왕인 사도세자가 생존시 온양온천행궁에 행차할 때 이곳에 들려 운주당에서 밤을 지내면서 산성백성들의 질고를 친히 묻고 창고를 열어 곡물을 하사한 고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성명명의 인연을 지나칠 수 없다. 정조18년 1794년 정월에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수원행궁으로 돌아온 정조의 축성중인 수원의 성곽을 돌아본 소감이다.
'현륭원의 묘소는 화산(花山)이요 수원부는 유천(柳川)이니 화인축성지의(華人祝聖之意)' '화산사람들이 성인(王)을 축하한다는 뜻'을 취하여 수원성을 화성(華城)이라 명명하였다. '화(花)와 화(華)는 서로 통하는 것이니 능침이 있는 화산(花山)의 뜻은 8백의 산봉우리들이 한 개의 뫼뿌리를 둘러싸서 서로 잡고 보호함이 꽃잎이 꽃의 한가운데로 향하여 모인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그 뜻을 설명하였다.

농경문화의 터전 수원과의 인연이다. 사도세자의 현륭원 천장이 완료된 후 화성축성공사가 진행되던 1795년 민족사의 영원한 이정표 수원에 사직단(社稷壇)이 세워진다. 사직단은 임금이 백성을 위해 토신(土神)과 곡신(穀神: 쌀, 보리, 조, 기장, 콩 등을 맡아보는 신)을 제사하던 제단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祈穀祭)를 사직단에서 지냈다.

이해는 정조가 일곱 번째 능행을 한 을묘년이다. 광교산 자락에 세워진 때의 고유문 요지다. 지지대 고개를 넘어 북지를 지나면서 북지를 수리시설로 개조하여 대유둔의 국영농장을 실현한 민생군주의 이상이 오늘날 만석거로 회자되면서 수원의 물줄기를 대변하고 있다.

수원의 지명은 일차 사료다.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모두가 농경문화의 근원을 전해주는 정조와의 인연이다.
'백성은 먹어야 하늘을 안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민생군주 정조의 정신이 푸르게 숨쉬는 수원의 내일은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면서 수원을 찾는 세계인에게 수원의 역사와 문화를 소통시키는 문화역량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수원의 자존심은 국운융성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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