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혁신칼럼] 드라마 이산을 보면서
수원시 공보담당관 서상기
2008-03-17 13:53:14최종 업데이트 : 2008-03-17 13:53:14 작성자 :   e수원뉴스

요즘 '이산'이라는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도 이 드라마가 방송되는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집으로 가서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내용은 이산 정조대왕이 목숨까지 노리는 정적들의 갖은 방해를 물리치고 조선조 제22대 임금으로 등극한 직후, 정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긴박감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드라마이긴 하지만 정조대왕은 왕위에 등극하기 전까지 또는 등극한 후에도 노론벽파인 정적들의 엄청난 견제를 받았습니다.
정조실록을 보게 되면 한편의 역사 소설을 읽는 듯 '드라마틱'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이산'이란 역사 드라마에 빠지게 된 이유는 우선 드라마 자체의 재미도 있지만 수원의 역사와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정조대왕과 사도세자, 채제공, 혜경궁 홍씨 등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 이전과 화성축성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루면서 전개될 것입니다. 점점 더 기대감이 커지는군요.

정조대왕은 오늘의 수원을 조성한 분입니다. 특히 수원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축성했고 조선시대 가장 규모가 컸던 화성행궁을 짓기도 했습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것입니다.

수원을 효의 도시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개혁과 혁신의 도시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먼저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무과 특별 과거(별시)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기도 했지요.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백성들을 강제 징발해 공사를 맡겼었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당시 기록은 전합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장안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정조대왕이 상공업에만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을 일굼으로써 오늘날 수원이 농업과학 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은 이렇듯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습니다.

정조대왕은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실학을 발달시켰으며,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조선시대 최대의 문예 부흥기를 이룩한 군주였습니다.
다만, 1800년 6월 28일에 49세라는 안타까운 나이로 일생을 마치면서 그가 꿈꾸었던 원대한 개혁이 미완으로 끝났지만 우리 수원에는 그의 효심과 개혁의지의 산물인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저는 드라마 이산을 보면서, 또는 화성을 보면서, 개혁과 혁신이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정조대왕의 개혁정신으로 새롭게 탄생한 도시 수원에 사는 우리들은 그분의 정신과 의지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정조대왕의 개혁정신을 벤치마킹하거나 연구해 우리 수원시정 발전의 지표로 삼는 것도 공직자로서 한번 시도해 볼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우리 공직자들이 표본으로 삼아야 할 것은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입니다. 

정조대왕이 말씀하셨던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모든 집들이 부자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화목하고 즐겁게 지낸다는 의미)... 이것이 바로 우리 수원시의 목표인 '더불어 사는 행복한 도시-해피 수원'과 같은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실학자들을 적극 활용했던 철저한 실사구시의 실학정신입니다.
이 실학정신으로 축성된 화성이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수원시의 랜드마크가 되고 관광산업의 베이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수원시의 김용서 시장님을 위시한 모든 공직자들에게 이 실학정신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실학정신은 현 정부가 강조하는 실용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는 오늘날 실학정신은 더욱 필요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시민을 위하고 수원시의 미래를 위한 우리 공직자들의 마음가짐과 혁신 행정을 위한 노력이 바로 실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프린트버튼캡쳐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