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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조심태 선생을 수원에서 잘 모셔야 하는 이유
염상균/(사)화성연구회 사무처장
2009-07-17 13:01:13최종 업데이트 : 2009-07-17 13:01:1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수원의 모든 역량은 이제 세계문화유산 화성으로 모아진다. 수많은 내외국인이 화성을 찾아와서 조선의 문화전성기 결과에 감동하고, 관계기관에서는 화성을 더 잘 가꾸고 알리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화성의 건설에는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 임금의 효성과 강력한 의지가 바탕에 깔렸다. 그러나 이를 실천해낸 지식인들과 관리들의 능력이 부족했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세계인들에게 떳떳이 자랑할 수 있을까?

세종 시대의 문화와 국가 발전에 황희 정승이나 맹사성 정승을 비롯하여 장영실 선생 등이 온힘을 모았듯이, 화성의 건설에도 채제공 정승과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힘이 결집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조심태(趙心泰1740~1799) 장군이다.
평양 조씨 경(儆)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1768년(영조44)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친다. 충청도병마절도사와 이순신 장군이 지냈던 삼도수군통제사며 좌포도대장과 장용영대장, 총융사까지. 

[칼럼]조심태 선생을 수원에서 잘 모셔야 하는 이유_1
[칼럼]조심태 선생을 수원에서 잘 모셔야 하는 이유_1

정조 임금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에 천장하기로 결정한 1789년 7월 11일 경기관찰사에 서유방, 수원부사에 조심태 장군을 임명한다. 이때부터 조심태 장군의 수원 경영이 시작된다.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겨서 현륭원으로 조성하고 현륭원 자리 가까운 곳에 있던 관아와 향교 등 도시 기반시설을 새 수원으로 이전하였으며 백성들 또한 새 터전으로 이주시켰다. 그는 무관답게 군사 제도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율령(律令)에도 정통하였고 농정을 잘 보살핀 목민관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특히 8척 장신의 장군답게 큰 글씨에 능했다고 하니 그 기개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화성의 건설에서는 감동당상으로서 실무의 총 책임을 맡았다. 정부와 각 지방의 역량을 결집시켜 3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화성을 완성해내는 집중력을 보였다. 아름다우면서도 방어에 있어 최고의 성을 만들어낸 것도 따져보면 그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만석거의 축조와 대유둔의 조성으로 인한 농업의 발전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또 화성 축성의 전말을 빈틈없이 기록하게 하여 '화성성역의궤'를 남긴 것은 우리 역사에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데 결정적이다.

조심태 장군은 그러나 60세를 일기로 1799년 9월 27일 세상을 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의 능력을 백번 믿어 의심치 않던 정조가 생존할 때여서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게다가 부의를 통상적인 것보다 갑절이나 늘려주고 관을 짜는 재목도 좋은 것으로 골라 지급하게 하였으며 의정부 좌찬성으로 증직까지 시켜준다. 임금의 사랑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 장신(將臣)은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중요한 직무를 전적으로 맡아 관서지방의 방어사부터 시작하여 북도와 남도의 병사를 계속 역임하다가 몇 해 사이에 마침내 장수로 승진하였다. 돌이켜보면 수원성을 건설하는 공역에 처음부터 정성을 쏟아 지대한 공을 세웠고, 말을 달리며 군사를 지휘하는 수고는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그 유례를 찾기가 드물었으므로 드높은 간성처럼 크게 의지하고 믿어왔다. 삼군(三軍)의 생살권을 맡고 판서의 품계에 오른 정도로는 그 노력에 보답하고 공적을 표창하기에 충분하지 못한데 큰 나무가 그리도 빨리 시들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너무도 슬픈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죽은 판서 조심태의 집에 성복(成服)하는 날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

조심태 장군의 부음을 듣고 정조가 내린 전교이다. 임금의 믿음이 뚝뚝 드러나는 전교이다. 그뿐인가? 정조 임금의 비밀 어찰이 새롭게 부각된 요즘이지만 조심태 장군에게 보낸 어찰도 15통이나 화성박물관에서 소장한다. 정조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지시했으니 이 또한 비밀어찰이 아닌가? 
 
[칼럼]조심태 선생을 수원에서 잘 모셔야 하는 이유_2
[칼럼]조심태 선생을 수원에서 잘 모셔야 하는 이유_2

조심태 장군의 묘는 김포에서 강화도 가는 48번국도 나진교 옆 야산에 놓였다. 묘소 주변에 칡덩굴이며 산딸기들이 엉킨 가운데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경기도는커녕 김포시의 문화유적 명부에도 오르지 않았으며, 이정표도 안내판도 하나 없다. 지하에 계신 장군이 통탄할 노릇이다.

수원시에서는 화성박물관을 중심으로 조심태 장군의 현창 사업을 진행한다. 장군의 동상도 세워야 하고 초상화도 제작하여 화성의 배후에 장군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후손들과 타협하여 묘소도 수원으로 옮기면 좋겠다. 장군의 묘역은 김포시보다 수원시에, 그것도 화성 주변에 놓였을 때 가치가 더욱 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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