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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 봄이 무르익으면 생각나는 사람
김우영/시인, 언론인
2018-04-25 16:06:31최종 업데이트 : 2018-04-25 16:03:19 작성자 : 편집주간   강성기
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올봄엔 목련과 매화,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벚꽃이 한꺼번에 피었다. 그러더니 며칠 전에는 여름날처럼 기온이 올라갔다.

미세먼지가 심해서 바깥나들이가 겁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온천하의 만물은 싹을 틔우고 나뭇잎의 색깔도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점점 짙어지고 있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목련꽃을 볼 때마다 어제의 일인 듯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람, 오주석이다.
1996년 오주석이 살던 집 목련꽃 그늘아래서, 왼쪽이 오주석(사진/이용창)

1996년 오주석이 살던 집 목련꽃 그늘아래서, 왼쪽이 오주석(사진/이용창)

나보다 한 살 많은 오주석은 지난 2005년 2월25일 세상을 떠났다. 벌써 12년이 흘렀지만 그의 미소와 말투는 어제인 듯 생생하게 기억된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수성고등학교 학생 때, 그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학생이었다. 1975년 고3 겨울 무렵이었다. 당시 소설가 백도기 목사와 박효석 시인이 함께 운영하던 팔달문 서쪽 팔달산 입구 카페 'Y하우스'에서였다. Y하우스는 문학청년과 클래식 음악마니아, 미술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던 곳이다. 시화전과 시낭송회는 물론 연극, 독서토론회도 열렸다.

오주석은 연극과 음악은 물론 미술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후 학부를 졸업한 뒤엔 대학원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비슷한 연배라서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그 뒤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나는 주로 그에게서 술을 얻어먹었다.

우리가 주로 가던 곳은 당시 팔달문 국민은행 옆 막걸리집 '국민집'과 현재 석산 호텔 옆 '목로주점'이었다. 신풍동 '감나무집'도 가끔 들렀다. 대폿집 '합창'은 '클래식 막걸리집'이었는데 여기도 단골집 중의 하나였다. 옛 지동시장(현 순대타운) 안에 있던 빈대떡집 충남집도 자주 갔다. 이 집들의 특징은 배부른 막걸리를 팔고 안주 값이 저렴하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모두 없어진 집들이다.

그때 오주석은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다. 70년대 중반 수원역 옛 터미널 옆에 '돌다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연극을 공연했다. 다방 겸 소극장이었던 셈이다.

샤사키트리 원작, 이기련 연출의 '여우와 개구리' '사랑은 돈보다' 등을 관람했던 기억이 나는데 오주석은 이들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멜빵 옷을 입고 연기에 몰입해 객석까지 뛰어나오며 소리를 질렀던 장면은 아직도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그리고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 각자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결혼을 하면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는 서울에서 영자신문사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기자 생활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 되지 않아 그만 두고 '본업'을 찾았다.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으로 있다가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원,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자기의 길을 걸었다.

1996년 봄, 수원시청 사진담당인 이용창 형과 고등동에서 술 한 잔을 하다가 문득 그가 생각나서 고등동 골목에 있는 그의 집을 '습격'했다. 양손에 막걸리와 안주거리를 들고...

마침 그가 부인과 함께 집에 있었다. 부인 김은애 씨는 피아니스트다. 수원시립합창단 수석반주자여서 신문사 문화부장을 했던 나와는 자주 만났던 터, 그리 큰 거리낌은 없었다.

그의 집안에는 큰 목련 나무가 있었는데 늦은 봄이라 흰 꽃잎이 마당이며 2층 옥상에 가득히 떨어져 있었다. 그의 2층 서재에서 술을 마시다 셋 모두 대취해 맨발로 서재 앞 옥상에 나가 목련꽃잎을 밟으며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었다.
1996년 오주석의 서재에서 취흥이 도도했던 필자(왼쪽)와 오주석(사진/이용창)

1996년 오주석의 서재에서 취흥이 도도했던 필자(왼쪽)와 오주석(사진/이용창)

그리고 몇 년 후인 1999년 오주석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을 펴내 유명해 졌다. 이 책을 못 읽은 사람은 이야기에 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오주석은 그 책도 내게 서명해 건네 줬다.

옛 그림 해설서라기엔 재미가 있었다. 친절하고 자상했다. 그리고 그의 박학다식에 새삼 감탄했다. 해박한 지식을 근거로 한 오주석의 자상한 설명으로 인해 청맹(靑盲)에서 벗어나 그림을 보는 눈을 조금 뜨게 된 것이다.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2004년이었던가 2003년이었던가 이른 봄, 고등동 주택가 작은 민속주점에서였는데 약간 초췌한 모습이었다.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유교와 불교, 정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오주석으로부터 백혈병으로 투병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4년 11월 내가 만드는 신문에 원고청탁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김형, 나 많이 아파요. 핸드폰은 전자파가 많아서 몸에 안 좋다네요. 나중에 다시 해주실래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난 그가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알았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나서 2011년 5월 경기 수원시 경기문화재단에서 수원예총이 개최한 '수원 출신 미술사학자 오주석 심포지엄'이 열렸다. 강당 300여석은 물론이고 통로에까지 사람이 가득 차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이 자리에서는 오주석의 업적, 오주석이 연구했던 정조와 김홍도의 문화적 의미, 오주석을 수원의 문화콘텐츠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에 대해 토론했다.

그가 소장했던 미술사 자료 4500여 점은 2016년 12월 수원시에 기증됐다. 이에 수원시는 전시공간을 확보해 그가 쓰던 서재를 재현한 '인문학자 오주석의 서재'를 운영하고 상설·기획 전시, 월례 강좌,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이다. 그날 부인 김은애 여사는 그와 내가 목련꽃 아래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건네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오주석 독서모임이 생기는가 하면 시내 어느 도서관엔 오주석 도서 코너도 있다. 수원사람들이 오주석에 이처럼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다. 놀랍고도 기뻤다. 그와 막걸리를 서로 건네며 목련 꽃잎이 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해 봄날을 떠올랐다.

오주석, 김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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