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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울게 하소서
정수자/시인.문학박사
2009-02-16 09:37:03최종 업데이트 : 2009-02-16 09:37:03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불현듯 손님이 닥친다. 불시에 맞는 불청객, 울음 손님.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런 감정쯤은 곧잘 추슬러 왔는데 말이다. 여간해서는 눈물을 내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조금 차고 강하게 비치는 인상이 안돼 보이는 것보다 낫다는 주의였었다.

그런데 요즘 누선에 이상이 생겼다. 어머니가 지상에 안 계시다는 것. 우리가 밥 먹고 웃고 떠드는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고 부를 수 없다는 것. 뻔한 사실이건만 그 인지만으로도 공황 같은 상태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불효라는 자책보다 더 자주 상실감만으로 눈물이 솟구치곤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지상의 어느 곳이 텅 비곤 한다.

어머니를 먼저 보내드린 분들은 그 상심의 크기를 알았다. 하여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따뜻한 위로를 건넸던 것이다. 그래도 누구나 겪는 일이니 남들만큼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비혼(非婚)'이라는 죄목 하나가 얹힌 탓에 더 의연한 척도 했던 것 같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그래서 '우아하게' 조문객들께 예를 다하는 듯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슬픔도 조금씩 지워지려니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이상하게 계속된다. '울게 내버려 두오'의 상태에 문득문득 빠져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겪은 이들은 이렇게 힘겨운 시간을 건넜거나 건너는 중일 것이다. 최근에 어머님 사십구재를 마치신 H의장님도 그래서 조문 답신에 눈시울을 붉히셨으리라. 조문 답신에 눈물났다는 이들도 부모님 생각에 한동안 젖었으리라. 그래서 다시 절감한다, 그 많은 사모곡이 과잉만은 아님을-.

그리고 사람 마음은 역시 같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말로 다할 수 없이 애틋한 것은 먼저 가신 부모님에 대한 마음들. 그런 과정을 겪으며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또 그런 측은지심을 나누는 게 이 세상을 이어가는 따뜻한 힘이 되는 듯싶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씩 더 철들어가고 또 늙어가는 것 아닐까.  

하건만 '울게 하소서'는 반복된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아리아답게 파문이 길다. 이 곡은 일찍이 영화 '파리넬리'에서도 슬픈 아름다움을 각인하고 전염시킨 전력이 있다. 이 노래처럼 혼자 깊이 울게 내버려두는 것. 누구든 그런 카타르시스가 때때로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누군가 울고 있다면 "울지 마" 할 게 아니라 "그래, 실컷 울어"라고 품을 내줄 일이다. 더불어 두 영혼이 말갛게 씻기도록.

하지만 사람 속에서 다스리는 것도 좋다. 울컥 솟는 눈물도 주변을 생각해 지그시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슬픔에 겨워 다른 사람을 불편케 하면 안 되니 자제가 더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저녁마다 사람들 속으로 나가곤 했다. 그들의 따뜻한 온기 속에 있으면 상실감이 조금씩 엷어진다. 삶을 더 돌아보게도 된다. 지금 이곳에서 더불어 산다는 것. 좋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산다는 것. 그 속에서 받은 격려와 위안 때문에라도 같이 따뜻한 삶을 만들자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지금 누가 울고 있는가. 그렇다면 '울게 내버려 두오'…… 하지만 어깨든 가슴이든 울 자리 하나는 조용히 내주시기를. 그리고 울음을 그치거든 뜨끈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건네시기를. 이렇듯 힘든 고비를 같이 넘어가면 오늘의 팍팍한 삶도 한층 훈훈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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