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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항일투쟁, 과연 나는 목숨을 걸 수 있었을까?
언론인 김우영
2019-06-10 12:44:24최종 업데이트 : 2019-06-10 14:40:49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항일투쟁, 과연 나는 목숨을 걸 수 있었을까?

[공감칼럼] 항일투쟁, 과연 나는 목숨을 걸 수 있었을까?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중국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수원시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염태영 공동위원장과 추진위원, 화성연구회 회원과 담당공직자 등으로 이뤄진 수원시 탐방단의 일원이었다. 나는 추진위원으로 동행했다.

탐방단은 33명으로 구성됐다. 귀국하는 길, 염태영 시장도 이를 신기하다고 말했다. 민족대표 33인과 같은 숫자라는 것이다.

탐방단은 2일과 3일 상하이(上海) 루쉰공원(魯迅公園)공원과 중국위안부 역사박물관, 임시정부와 만국공묘, 자싱시(嘉興市) 김구 선생 피난처를 방문한데 이어 4일 항저우(杭州)로 이동,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다.

먼저 찾은 곳은 임시정부 요인인 박은식·신규식·노백린·안태국·김인전 선생 등이 묻혔던 상하이(上海) 만국공묘였다. 지금은 송경령 기념관으로 불리는데 5인의 애국지사들의 유해는 1995년 우리나라로 봉환됐고, 현재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꽃을 올리고 묵념이 끝났음에도, 34도나 되는 무더위임에도 누구하나 먼저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묘역의 정적 속에서 새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어 상하이사범대 안에 있는 한중 평화의 소녀상에 헌화하고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에 들러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동행한 최호운 (사)화성연구회 수석부이사장은 "독일은 전쟁으로 인한 모든 범죄를 진정성 있게 사과했고 지금도 사과는 이어지고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일본 총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쉴 틈도 없이 찾은 곳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였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한 대표적인 청사로써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프랑스 조계(租界)에 자리 잡았다.

이곳에 모인 애국지사들은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해 발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한 역사적인 곳이다.

이날 선포된 임시정부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었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은 것이다.

나머지도 선진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인민은 평등하고 자유권을 가지며, 모든 공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는 내용도 있다. 신분차별, 빈부차별, 남녀차별도 배제됐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이곳에서 법으로 명문화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임시헌법을 제정하고, 외교활동을 펼치며 광복군을 창설해 항일무장투쟁도 전개했다.

이러니 일제의 탄압은 더 가혹하고 집요해질 수밖에 없었고 임정 청사는 상해에서 항주로 옮겼다가 이후 진강·장사·광동·유주·기강·중경으로 이동해야 했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험난한 대장정이었다.
상하이 루쉰공원에 있는 매헌 윤봉길 기념관 윤봉길 의사 흉상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염태영 시장/사진 김우영

상하이 루쉰공원에 있는 매헌 윤봉길 기념관 윤봉길 의사 흉상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염태영 시장/사진 김우영

3일엔 상하이 루쉰공원에 있는 매헌 윤봉길 기념관을 방문했다. 루쉰공원의 옛 이름은 홍커우공원(虹口公園)이다. 현재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혁명가로서 '아Q정전'을 쓴 루쉰의 이름을 따와 루쉰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열린 일본 전승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의거로 일제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등은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5월25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12월19일 총살당했다. 그때 윤의사의 나이는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수원시 이동근 학예사는 "일제가 윤 의사의 유해를 가나자와 형무소 출입구에 파묻고 오가는 일본인들이 그곳을 밟고 다니도록 했다"고 설명하자 탐방단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자싱시(嘉興市)로 이동해 김구 선생 피난처를 찾았다.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후 프랑스조계에서 쫓겨나 중국 관내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자싱에서는 중국인 추푸청(1873~1948년)의 도움으로 2년간 머물렀다. 추푸청은 아들 추펑장과 며느리 주자루, 며느리 집안까지 총동원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적극 보호했다. 거액의 현상금 유혹까지 이겨낸 추푸청 일가의 도움으로 임시정부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싱시(嘉興市)  김구 선생 피난처/사진 김우영

자싱시(嘉興市) 김구 선생 피난처/사진 김우영

1996년 한국정부는 추푸청에게 독립유공훈장을 추서했고 자싱시정부는 2000년 김구 선생이 머문 자싱 남문 메이완제(梅灣街) 76번지를 시(市)급 문물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2005년에는 이곳을 전면 수리하고 성(省)급 문물보호지역으로 선포했다. 르후이차오(日暉橋) 17번지의 한국임시정부 요원 숙소도 개방했으며 추푸청 역사자료실도 마련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둘러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여차하면 도피할 수 있도록 비상구 밖에 배를 대기시켜 놓은 것을 보면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추진위 정수자 학술위원장은 "이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울러 이렇게 귀중한 역사의 현장을 잘 보존해준 중국 자싱시정부에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4일엔 항저우(杭州)로 이동,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는 2014년 중국 정부가 '국가급 항전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한 곳으로 상해를 떠난 임정이 사용했던 곳으로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약 3년간 머물렀다.
항저우(杭州) 임시정부 청사/사진 김우영

항저우(杭州) 임시정부 청사/사진 김우영

 이번 탐사에 동행하면서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고, 한편으론 슬펐다. 항일 독립투사들이 존경스러웠고 그분들을 도와 준 중국인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탐방 기간 내내 '나라면 그때 목숨 건 항일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고민했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공감칼럼, 김우영,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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