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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1980년 5월, 그로부터 40년이 지났다
언론인 김우영
2020-05-22 17:54:06최종 업데이트 : 2020-05-22 17:54:25 작성자 :   e수원뉴스
[공감칼럼] 1980년 5월, 그로부터 40년이 지났다

[공감칼럼] 1980년 5월, 그로부터 40년이 지났다

지난해 5월 18일 장안공원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기념식 사진전시회(사진/수원시포토뱅크 김기수)

지난해 5월 18일 장안공원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기념식 사진전시회(사진/수원시포토뱅크 김기수)

다시 5월이 왔고, 그 5월도 지나가고 있다. 

40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나는 군대에 있었다. 그해 7월이면 제대를 하는 이른바 말년병장이었다. 애기봉 근처 전방에서 복무하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군대생활은 참 다사다난했다. 생전에 늘 자식 걱정이 끊이지 않으셨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이제야 밝히지만 난 영창도 다녀왔다. 첫눈 오는 날이었고, 비상이 걸린 상태였는데 그걸 모르고 술에 취해 있었다. 

헌병차에 태워져 자대영창으로 끌려가는 중 펄펄 내리는 눈을 보며 "와, 첫눈이다"라고 했더니 헌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1979년 10월 27일 미명 무렵 대대 '독사'란 별명을 가진 선임하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영내 복귀했다. "야야, 큰일 났다. 빨리 라디오 틀어봐라!" 그의 말에 따라 라디오를 틀었더니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애절한 장송곡이 들리더니 여자 아나운서가 울음 섞인 목소리(나는 그렇게 들었다)로 이렇게 말했다.

40년이 넘은 일이라 모두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대통령이 서거했다"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10.26 사건이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제대를 1년도 안 남겨놓은 때였다. '이제 전쟁이 벌어져 죽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해 12월 12일에는 이른바 '12.12사태'가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군부 실세로 등장한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이다.
군사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야당 의원을 체포·투옥함으로써 '서울의 봄'은 끝나고 민주주의는 엄혹한 겨울을 맞았다. 다음날 광주에서 5·18 광주민주항쟁이 시작됐다.     
군대생활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을까! 이 무슨 팔자인가.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우리들은 계엄군도 되어봤다.
당시 광주에는 내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 시를 쓰는 이들이었다. 몇 차례 광주에 내려가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 공짜 안주를 열 몇 가지나 내주는 대폿집에서 술도 마셨다. 

제대 말년에 근무했던 부대는 북한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최전방이어서 텔레비전에서는 북한 방송이 잘 잡혔다. 어느날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광주 금남로에서 벌어지는 광주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장면을 보게 됐다. 하지만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북한의 조작방송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7월 '다행스럽게!' '무사히!' 제대를 하게 됐다. 내가 제대하고 난 이듬해 모든 병사들에게 '국난 극복장'이라는 기장이 수여됐다고 한다. 무려 100만 명에게 말이다.

제대 후 황석영이 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라는 5.18 기록을 읽고 분노와 참담함과 미안함, 고통에 몇 날 밤 잠을 못 이뤘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책을 몰래 돌려 읽은 벗 정수자 시인도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와 만났다. 

군 생활 중에 10.26, 12.12, 무장간첩 침투사건, 5.18을 겪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다. 
논산 훈련소 입소 전에 수용연대라는 곳에서 '장정' 생활을 할 때다. 어느 날 얼룩무늬 군복을 빳빳하게 차려 입은 공수부대 하사관들이 모두를 집합시켰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장정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특전사 대원들이다. 귀관들은 영광으로 알도록. 그리고 호명된 장정 외에도 '사나이 중의 사나이'인 특전사에 지원하고 싶은 장정은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오길 바란다"

내 이름이 불려졌다. 내가 왜? 아뿔싸, 신상기록에 태권도 유단자라는 것을 밝혔고 신장도 당시 176.5cm로 큰 편에 속했으니 차출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쌔한 예감에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해놓고는 수용연대 구석에 가서 꼭꼭 숨어버렸다. 그리곤 점호 전에 내무반에 들어가 물어보니 한참 기다리다가 그냥 갔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처럼 어수룩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때 공수부대에 들어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40년째 5월이 왔다. 그리고 5월도 거의 지나가고 있다. 아직도 발포명령자 등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자들의 사과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5월은 부처님도 오시고, 어린이와 어버이, 스승 모두 기뻐하는 날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 가슴 한쪽이 늘 무겁다.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언론인 김우영 저자 약력

공감칼럼, 김우영, 198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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