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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칼럼] 가을, 서호에서 생각한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
김우영 언론인
2020-10-19 14:04:50최종 업데이트 : 2020-10-19 14:04:29 작성자 :   e수원뉴스
가을, 서호에서 생각한 추수문장불염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로 잘 알려진 이 시는 중국 북송시대 형제 학자 정명도, 정이천의 인품과 학덕을 칭송하는 것으로 형 정명도를 '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 동생 정이천을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이라고 했다.

 

봄바람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아량 있는 대장부, 맑고 깨끗한 가을의 냇물처럼 맑고 깨끗한 인품을 노래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면 춘풍(春風)처럼 모두를 품어 안아야 하고, 학자나 문인, 언론인의 글은 추수(秋水)처럼 차고 맑아 사욕이 없어야 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추수문장 불염진(秋水文章 不染塵)'을 되새길 때마다 부끄럽다. 과연 나의 시 나부랭이와 기사, 칼럼들이 세상의 티끌에 오염되지 않은 가을 물과 같은 문장이었던가.


서호의 원래 이름은 축만제다.

서호의 원래 이름은 축만제다.


오늘 이 시구를 중얼거리다가 문득 서호가 보고 싶어졌다. 지난봄 서호(西湖)에서 느꼈던 춘풍(春風)에 이어 이 가을 추수(秋水)도 보고 싶었다.

 

정답고 그윽한 서호(축만제 祝萬堤)의 가을.

 

서호는 1799년(정조 23)에 정조대왕의 명에 따라 축조됐다. 역사성과 현대까지 이어진 농업혁명의 산실이다.

 

경치도 아름답다. 수원팔경(水原八景)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풍경이다. 서호에 접해있는 여기산 산 그림자가 호반에 비치거나 노을이 지는 모습을 서호낙조(西湖落照)라고 했다. 노송 몇 그루가 운치를 더해주는 제방 서쪽 끝에는 항미정(杭眉亭)이란 정자가 앉아있다. 나혜석도 이 풍경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그린 서호 그림에도 항미정이 있다.

 

조선시대엔 이곳의 잉어가 유명해 궁중에 진상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고 멸종 위기종인 수원납줄갱이가 서식지할 정도로 수질이 깨끗했다. 내 어렸을 때만 해도 항상 낚싯꾼이 수십명 씩 앉아 있었다. 여름날 수문 아래에서는 아이들이 미역을 감았다.


가을날의 서호 / 사진 김우영

가을날의 서호 / 사진 김우영

가을 정취 가득한 서호. 건너편 얕은 산이 여기산이다. / 사진 김우영

가을 정취 가득한 서호. 건너편 얕은 산이 여기산이다. / 사진 김우영


그런데 80년대가 되면서 서호천 상류와 농촌진흥청의 오폐수가 유입되어 악취와 거품이 일어나는 죽은 호수가 됐다. 당시 전철엔 냉방기가 없어 여름철엔 창문을 열고 다녔는데 서호 옆을 지날 때는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수도권의 명물인 서호가 죽었다. 모두가 회생이 불가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원천의 기적'처럼 '서호의 기적'이 일어났다. 1990년대 초반 수원문화원을 중심으로 서호 살리기 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수원문화원장은 고인이 된 심재덕(전 수원시장, 국회의원)씨였다. 나는 그때 수원문화원이 발행하는 월간 문화소식지 '수원사랑'에 글을 써서 게재하는 등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수원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서호를 소개하고 서호의 원형과 생명체를 복원해 시민에게 개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서호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심원장이 시장으로 당선된 후엔 시민공원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사계절 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더 기뻤던 것은 2016년 11월 5일-12일 태국 치앙마이에서 개최된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집행위원회에서 한국 최초로 벽골제(김제)와 함께 ICID '세계 관개유산'(HIS : Heritage irrigation Structures)으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이 돌아왔고 여기산은 백로들의 서식지가 됐다. 물위엔 야생오리 등 각종 철새들이 둥둥 헤엄치고, 가운데 인공 섬은 서호 물고기를 먹이로 하는 가마우찌의 낙원이 됐다. 가마우찌의 분뇨로 인공섬의 식생이 파괴된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이날 산책 중 오랜 지기인 ㄱ선생을 만났다. 20대 때부터 적극적으로 환경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와 가마우찌로 인해 나무들이 하얗게 죽어가고 있는 인공섬을 보며 한탄했다. ㄱ선생은 "가마우찌가 저토록 많다는 것은 서호의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증표이긴 하지만 엄청난 식성을 가진 저 녀석들로 인해 물고기 씨가 마르고 나무들도 고사하고 있으니 문제"라며 "길고양이라도 잡아서 저 섬에 들여보내자"라는 농담도 했다.

야생오리가 물위에 가득 떠있고 가무우찌는 섬을 점령하고 있다.

야생오리가 물위에 가득 떠있고 가무우찌는 섬을 점령하고 있다.

가을이 깊어간다. 겨울이 오기 전, 단풍잎이 모두 떨어져서 쓸쓸해지기 전 다시 한 번 서호 산책을 해야겠다. 정신 사나운 글과 말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시대, '추수문장 불염진(秋水文章 不染塵)'의 뜻을 헤아리면서.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자 약력

 

 

공감칼럼, 김우영, 서호, 축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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