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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사도를 찾아간 길..수원화성 원행 8일
수원화성으로 가는 길-1
2015-12-07 13:57:12최종 업데이트 : 2015-12-07 13:57:12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정조가 사도를 찾아간 길..수원화성 원행 8일 _1
정조의 현륭원 참배길을 재연하는 능행차 연시에서 정조가 수원화성 장안문을 들어서며 말에서 내려 환영하는 길가의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수원시가 내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정하고 수원 관광자원을 총동원해 관광산업의 도약을 꾀한다. 왓츠뉴스는 성공적인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위해 ①정조가 사도를 찾아간 길, ②다산이 설계한 수원화성 성벽길, ③역사와 생태가 살아있는 수원천 길, ④대한민국 경관대상 광교 호수공원 길 등 '수원화성으로 가는 길' 시리즈 4편을 게재한다.)

6천명 4㎞ 행렬 조선시대 최대 규모 행차

1795년 을묘년 윤2월 9일 묘시 정조는 세자 사도의 능에 참배하기 위해 어머니 혜경궁을 가마에 모시고 창덕궁을 떠났다. 행렬 중심에 혜경궁의 가마가 있고 깃발, 호위병, 수라가마, 군대, 악대가 섰다. 행렬은 사람 6천여 명과 말 1천400필로 구성됐고 길이가 4㎞에 이르렀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성대하고 장엄한 행차다.

노량진에 이르러 행렬은 배다리(舟橋)를 건넜다. 용산과 노량 340m를 36척의 배로 이었고 왕의 행차에 걸맞게 3개의 홍살문이 설치됐다. 서용보, 정약용이 왕의 명을 받아 능행을 앞두고 11일 동안 건설했다. 강 언덕에는 수많은 백성이 몰려 정조의 행차를 지켜봤다. 

첫날 밤 시흥행궁에 묵었다. 이튿날 점심 무렵 비가 내리고 정조는 길을 재촉해 저녁에 수원화성 행궁에 도착했다.

현륭원 참배 혜경궁 통곡

화성 행차 셋째 날 정조는 수원향교에서 공자의 신위에 절하고 예물을 올렸다. 당시는 서학, 즉 천주교가 들어오던 때로 자신의 통치이념은 성리학이라고 정체성을 분명히 한 것이다. 행궁 우화관에서 문과, 낙남헌에서 무과의 별시를 시행해 경기도 지역 인재를 등용했다. 

넷째 날 정조는 이른 아침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참배했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은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오후에 서장대에 올라 화성에 주둔한 5천명 친위부대를 동원해 주간과 야간 군사훈련을 주관했다. 훈련의 위용은 정조의 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노론 벽파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다섯째 날 행차의 하이라이트 혜경궁 회갑연을 봉수당에서 거행했다. 회갑잔치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종친과 혜경궁 친정 식구들이 참석했고 궁중 무용 선유악이 공연됐다. 여섯째 날 오전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낙남헌에서 지역 노인 384명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때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 음식이 모두 같았다.

정조가 사도를 찾아간 길..수원화성 원행 8일 _2
화성행궁 낙남헌 양로연도

양로연 노인과 정조 같은 메뉴

양로연을 마치고 정조는 화성 건축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방화수류정을 둘러보고 오후에 행궁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했다. 일곱째 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조는 아버지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광교산 고갯길에 이르자 뒤를 돌아보느라 머뭇거리며 걸음이 느려졌다. 정조는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에 해당하는 이 고개 이름을 지지대라 부르게 하고 비를 세웠다.

정조는 오던 길 그대로 돌아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더 묵고 8일째 되던 날 한양으로 돌아갔다.
7박 8일 정조 행차 명목상 이유는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이었다. 왕이 부모에 대한 효행을 실천함으로 백성에게 효를 권장하고 있다. 왕실 가족만의 행사에 그치지 않고 노인을 위한 양로연, 인재 발탁을 위한 별시, 백성에게는 쌀을 나눠주며 왕도의 규범을 보였다.

왕권확립 정치적 노림수

정조의 노림수는 그러나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는 그의 배다른 형 경종 독살설과 출신성분 문제로 끈질기게 정통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다. 세자 사도는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신원론과 불가론이 여전한 상태에서 아직도 죄인이었으며 정조는 그 죄인의 아들이라 왕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노론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었다.

정조가 사도를 찾아간 길..수원화성 원행 8일 _3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창경궁 문정전

정조는 2년에 걸쳐 화성 행차를 준비했다. 궁을 비우고 행정부가 모두 이동하는 조선시대 최대 행차로 왕권이 확립됐음을 과시했다. 일행의 상당수가 처음 마주친 수원화성은 새로 도읍 하기에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주간과 야간에 걸친 친위부대의 군사훈련은 왕의 위엄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정조는 조정 대신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조는 그 행차를 이끌고 세자 사도의 묘 현륭원에 참배했다. 정조는 나이 11살에 아버지 사도가 뒤주에서 굶어죽는 모습을 목격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경험을 했다. 왕이 그 사도의 묘에 절하자 문부백관이 뒤에서 엎드렸다. 더 이상 사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없었다. 

정조의 흥미진진한 스토리 수원화성

정조는 세자 사도를 찾아 수원화성을 방문했다. 인간의 도리인 효를 실천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왕도를 보였다. 대규모 행차는 왕권을 확립하는 정치적 시위이기도 했다.

수원시가 화성축성 220년이 되는 2016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정하고 4대문을 활짝 열어 풍선한 잔칫상을 준비한다. 정조의 역사가 살아있는 수원화성을 방문 해 그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빠져보자.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수원화성 원행길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 

의궤(儀軌)란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고 난 뒤 후세에 참고하도록 행사 내용과 경과, 대책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원행(園幸)은 정조가 사도의 묘 현륭원을 찾아갔다는 의미고 을묘(乙卯)년에 정리(整理)자라는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뜻이다. 원행에서 '幸'자를 쓴 것은 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을 행행(行幸)이라 한데서 비롯된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수원화성 행차를 마치고 열흘만인 1795년 윤2월 27일 의궤를 편찬하라는 정조의 어명에 따라 주자소에 의궤청을 설치하고 좌의정 채제공이 총리대신을 맡았다. 그해 8월 15일 교정을 끝내고 인쇄를 시작해 1797년 3월 24일 완성했다.

10권 8책으로 구성된 의궤는 혜경궁의 화성행궁 회갑연 개최와 관련한 정조와 조정 신료들의 논의 내용, 행차의 세부절차, 물자와 인원 동원계획 등을 실었고 회갑연 참석자, 잔칫상 차림표, 장식한 꽃송이 개수까지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정조가 사도를 찾아간 길..수원화성 원행 8일 _4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반차도

의궤 첫 권인 권수의 도식은 행차 주요 장면을 판화로 남겼고 별도로 컬러로 그린 반차도와 화성능행도병은 당시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재연하고 있다. 15m 길이의 반차도(班次圖)는 문무백관이 계급 순서대로 늘어선 행렬을 그린 것으로 왕실 기록화이면서 커다란 풍속화를 연상시킨다.

병풍 형태로 그렸다는 능행도병은 향교 공자묘를 참배하는 화성성묘전배도, 별시 합격자를 시상하는 낙남헌방방도, 회갑잔치를 그린 봉수당진찬도, 양로연을 그린 낙남헌양로연도, 야간군사훈련 서장대성조도, 활을 쏘고 폭죽놀이를 하는 득중정어사도, 시흥행궁으로 돌아가는 시흥환어행렬도, 배다리를 건너는 노량주교도섭도 등 8폭으로 전한다.

이 그림들은 정부 기관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당시 최고 화가 김홍도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유네스코는 지난 2007년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화성의 건축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등과 함께 '의궤'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 왓츠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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